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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자기가 누군지를 알려면 먼저 자기(에고)를 들여다보아야 합니다.거기에는 신앙(信仰)도, 교리(敎理)도 필요 없습니다. 한 발짝 뒤로 물러서서 자기를 덤덤히 볼 수 있어야 합니다."아! 이것이 나의 본모습이구나" 할 때, 거기에 만족함이나 불만, 뿌듯하거나 우울함이 조금이라도 실려있다면 다시 한 발 뒤로 물러서십시오. 그것은 본래 모습이 아닌 에고의 작용이기 때문이다. 혹시 시기하는 마음이나 노여운 감정이 살아있다면 한 발 더 물러나야 합니다. 무어라 말할 수 없는 적적(寂寂)함만이 지속된다면 일단계는 통과입니다.무사인(無事人)이 된 겁니다. 그다음에 할 일은 그저 지켜보고, 지켜보고, 지켜보기 뿐입니다.
불교와 인연이 있는 사람, 공부를 좀 했다는 사람일수록... 자기를 부정한다. '자아(自我)'를 죽여야 할 대상으로 생각한다. 그리고 비판(批判) 없이 그것을 따르는 많은 사람이 있다. 나는 자기를 '없다'고 하고 부정하는 사람을 신뢰하지 않는다. 그것은 석가의 삼법인(三法印) 중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교리(敎理)에 근거한다. 과연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가? 존재는 연기(緣起)하는 것이 맞고, 다분히 의타기성(依他起性)을 지니고 있으므로, 이론상(理論上)으로는 반박할 여지가 없는듯해 보인다. 그렇다면 '에고(자아)'를 죽여야 하고, 무아(無我) 교리를 따라, 나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해야 할까? 그렇게 생각하는 '그것'은 무엇인가? 무념무상(無常)을 체험..
우리가 깨닫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첫째는 "나는 없다"는 전제(前提)를 놓고 공부를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서는 찾을 그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또 그렇게 믿어야 한다.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때리는 자도, 맞은 자도 없는데, 아픔만 있다." 즉, '내가 없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말에 생각 없는 많은 사람이 동조한다. 한마디로 바보 게임, 벌거벗은 임금님 놀이이다. 조작된 교리(敎理)에 속지 말라. 뇌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 여기 엄연히 이렇게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할 수는 없다. 쉼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시(注視)에 마음을 쓰면, 쉼 없이 변하는 그것(사물)들을 쉼 없이 알아채고 있는 '..
타인에게 관심을 나타내고,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란 것, 너도 없고 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뿌듯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그리되면 정말 곤란한 일이 생긴다. 이 사회가 무너질 것이다. '너도 없고, 나도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리 말하고 하룬들 살 수 있겠는가? 이론(理論)과 교리(敎理)는 그것대로 책 속에, 머릿속에 그대로 두라. 그랬을 때 아름답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