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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자아(自我)는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다. 자아는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만 있는 것이다. 사람은 즐겁기도 하고, 괴롭기도 하는데, 그 이유는 자아가 있기 때문이다. 단전(丹田) 역시 자아와 마찬가지고, 기(氣) 역시 마찬가지다. 그것 역시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만 있다. 단전은 블랙홀과 화이트홀 두 기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가진 사람은 그곳을 에너지(氣) 창고로 쓰며, 그곳에 에너지를 모으기도 하고, 배분하기도 하고, 흐르게 하기도 한다. 단전을 모르는 사람, 단전이 생성되지 않은 사람에게도 에너지는 있다. 하지만 그의 에너지는 종잡을 수 없이 기분(氣分)에 따라 좌지우지한다. 그에겐 단전의 중심 자리가 없기 때문이다. 단전은 자리 잡기 좋은 자리에 자리 잡는다. 하지만 우리 몸 어떤 자리라도 단전의..

'나'와 '나의 것'을 구별하며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그런 사람을 깨달았다고 합니다. 소유물은 나에게 편리를 주지만, 그것은 내가 아닙니다.그것은 언제라도 바뀔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뀔 수 있는 것은 내가 아닙니다.그것은 내가 소유하고 있는 것들 뿐입니다. 이 몸은 내가 아닙니다.이 마음도 나는 아닙니다. 늘 바뀌고 있는 것들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없다(無我)'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그들이 그리 말하는 이유는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것들 외에 변하지 않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선도(仙道)에서는 '기(氣)'와 '신(神)'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사라지지 않습니다. 불변의 법칙 속에 있기 때문입니다. 氣에 神에 관심을 가져보십시오.불안이 없는 넉넉한 인생을 살게..

오온(五蘊)을 '나'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그것들은 조건에 의해 있는 것이므로, 조건이 다하면 자연 속으로 환원(還元)되고 말기 때문이다. 오온이 '나'라고 믿고 있는 그들에게, 당연히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웃고, 울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가 오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라. 우리 사람에겐 五蘊을 작동시키는 무엇(에너지)이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무엇'이 있다. 만약, 당신 의식이 에너지(氣)와 지켜보는 자에 맞춰질 수 있다면, 영영토록 존재할 수 있다. 선도(仙道)에서 기(氣)를 중시하고, 氣와 신(神)을 계합(union)시키려 애쓰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그 조건이 충족되는 한, 당신은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산다.

'신행즉기행(神行卽氣行)'이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가면 기도 간다'는 뜻이다. 그것이 마음대로 되지 않는 사람이 있다면, 그 이유는 마음이 덜 닦였기 때문이다. 수련을 하면 마음이 가는 곳으로 氣가 가는 것을 안다. 간단히 실험해 보자. 손바닥에 마음을 보내 고정해 보라. 그곳에 氣가 생기는 것을 자연스레 알게 될 것이다. 손바닥에 마음을 보내 그곳에 氣가 머물게 할 수 있는 사람이 단전(丹田)에 마음을 보내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당연히 의수단전(意守丹田)이 이루어지게 마련이다. 잘되지 않는 사람은 먼저 마음의 폭을 넓혀야 하는데, 그것을 우리는 마음을 닦는다고 한다. 마음을 닦으면 마음이 순수해진다. 그리되면 '된다', '안 된다'가 사라지고, 마음을 보내는 곳이면 어디든 氣는 간다. 먼저 몸부터..

기(氣)는 이론도 교리도 아니며, 신앙은 더더구나 아니다. 그것은 우리 삶의 원동력이며, 작용력이다. 그것은 기독이나 불교처럼 선택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이 약하면 몸과 마음도 약해지고, 그것이 다 하면 죽게 되는 것으로, 가장 소중하고 가까이해야 할 것은 바로 그것이다. 선도(仙道)의 차별성은 氣를 수행의 주체로 삼는다는 것이다. 氣는 몸과 마음을 연결해 작용들을 하게 돕는 것이다. 氣가 넉넉하고 잘 통하게 되면 건강해지고, 이어서 본래면목(本來面目)을 추구하게 되는데, 그것이 성명쌍수(性命双修)이다. 아무나 氣 수련을 하는 것이 아니며, 아무나 氣를 길러 본래 자리를 회복하는 것도 아니다. 사람에게 삶의 의미는 없다. 각자 어떤 의미를 두고 사느냐가 삶의 의미다. 氣를 이해하고 그것을 닦아 부리며 사..

기(氣)를 받으려면 최소한 기본 통기(通氣) 정도는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바싹 마른 땅에는 물을 부어봐야 겉돌기만 할 뿐 스며들지를 않고, 펌프로 물을 푸려고 해도 최소한 물 한 바가지는 부어줘야 한다. 거저 얻은 것은 거저 나간다는 말이 있다. 최소한 성의(誠意)는 표현할 줄 아는 사람에게 氣도 움직인다. 시험 삼아 氣를 받아서는 딱 그 정도만 氣를 받아 갈 수 있고, 氣를 모르고 불신하는 사람에게 氣는 배려하지 않는다. 氣를 받고자 하는 사람은 최소 기초가 되는 외단공(外丹功) 정도는 미리 익혀야 한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사람에게만 은혜를 베풀게 되어 있으니 말이다. 氣는 만물을 살리는 힘이다. 사람은 氣로 태어나서 氣로 살다가 氣가 다하면 죽는다. 氣를 갈무리 잘하는 사람은 건강하게 오래 살 수..
아는 사람은 그저 알 뿐, 믿지 않습니다. 오직 모르는 사람만 믿으며 종속되어 삽니다. 세상엔 氣를 알고 사는 사람과 氣를 모르고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氣를 아는 사람은 세상을 움직이는 또 다른 힘이 있음을 알고 삽니다. 그러나 氣를 모르는 사람은 돈과 권력만이 세상을 움직인다고 믿습니다. 氣를 아는 사람은 지금 여기에서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그러나 氣를 모르는 사람의 생각은 언제나 과거나 미래에 가 있습니다. 氣를 아는 사람은 Relax 상태로 살지만, 氣를 모르는 사람은 긴장이 지속되고 몸과 마음이 불편합니다. 氣는 눈에 안 보일 수 있지만 실재(實在)합니다. 氣가 없으면 글을 읽고 이해할 수도 없기 때문입니다.
모든 견성공부(見性工夫)는 대상(對象)에 대한 몰입(沒入)으로 시작한다. 기도(祈禱), 지관(止觀), 간화선(看話禪), 관상(觀想), 염불선(念佛禪), 단전호흡(丹田呼吸) 등등 모든 수행(修行)의 귀결(歸結)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三昧)이다. 선도(仙道)는 의식(意識)으로 氣(에너지)를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의수단전(意守丹田)으로 삼매(三昧)에 이르고 그것을 통해 견성(見性)한다. *의수단전이 중심(中心)이 되어야 하는 이유: 氣는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의 양쪽에 걸쳐 생명력(生命力)의 원천(源泉)이며, 상대계(相對界)와 절대계(絶對界)를 수렴(收斂)한다. 氣는 본성(本性)에 가장 가깝다. 즉, 수련(修鍊)의 과정(過程) 중 모두가 유실(流失)되어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선도는 회귀신선(回歸神仙)을 위한 동북아(한국, 중국, 일본)의 수련법이고, 요가는 브라흐만(Brahman; 삼라만상의 궁극적 실체)과의 합일을 위한 인도의 수련법이다. *여기서의 요가는 아드바이타 베단타 학파의 사상이 입혀진 19세기 미국과 유럽에서 대중화된 요가를 말함. 인도 고대요가, 전통요가의 최종 목표는 학파에 따라 다르다. 이 둘은 서로 닮아있으면서도 꽤 다르다. 둘 다 깨달음을 얻기 위한 수행법이지만, 형(形)과 색(色)의 세상을 이해하고 받아들이는 기본적인 시각이 조금 다르다. 선도는 상생과 순환, 즉 수평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지만, 요가는 비본질적인 것과 본질적인 것, 즉 상하 수직적인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본다. 때문에 수행법도 놀라울 만큼 공통점이 있기는 하지만 한편으로는 대단히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