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Taiji Yoga/5. 진리 (the Truth) (17)
谷神不死
일식(日食)은 눈으로 먹고, 한식(韓食)은 혀로 먹고, 중식(中食)은 배로 먹는다는 말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음식을 먹을 때 일단은 눈으로, 다음은 맛을 보고, 이어서 배불리 먹어 피가 되고 살이 되게 합니다. 眞理는 일단 머리로 이해하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이해가 없으면 그다음은 없습니다. 이해가 무르익으면 그것이 가슴에 자리 잡습니다. 진리에 대한 체험이 오기 시작합니다. 체험이 반복되면서 진리에 대한 이해가 배(丹田)에 고정됩니다. 불퇴전(不退轉), 즉 도달한 수행의 경지에서 물러서지 않는 단계입니다. 仙道 용어로 기우귀가(騎牛歸家), 소를 타고 집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문: 사람의 근본은 선(善)합니까? 악(惡)합니까? 답: 자기 마음을 들여다보십시오. 그러면 알게 될 일입니다. 한번 그리해 보십시오. 당신의 본래 자리는 善도 아니고, 惡도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될 것입니다. 사람은 선하지도 악하지도 않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의 선택일 뿐입니다. '번뇌(煩惱)가 곧 보리(菩提)'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마음은 하나입니다. 거기에서 탐진치(貪嗔痴)도 일어나고, 깨달음도 일어납니다. 일어나는 것들에 연연치 말고, 일어나는 바탕 자리에 관심을 고정해 보세요. 마음을 조복(調伏) 받을 필요는 없습니다. 마음은 구조적으로 흔들리게 되어 있습니다. 휘둘리지 말고 마음이 일어나는 바탕 자리에 관심을 고정해 보세요. 무엇과도 비길 수 없는, 크고 밝으며, 모든 어려움을 단번에 해결하는 ..
생각을 적대시해서는 안됩니다. 그것은 억누를 일이 아닙니다. 그것은 없앨 수도, 버릴 수도 없습니다. 그것은 왔다가 이내 연기처럼 사라지지만, 그 안에 有用한 정보도 들어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을 이용해 우리 일상생활에 편리한 것들을 만들어냅니다. 하지만 그것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생각은 단지 생각일 뿐입니다. 그것이 모두라고 생각하지 말아야 합니다. 眞理(自性)를 깨우치려면 생각의 뒤를 보는 눈이 필요합니다. 그것은 생각보다 한 단계 더 높은 지능입니다. 극소수의 사람들은 우연히 그 눈이 열리지만, 대다수의 사람에게는 그것(眼目)을 얻기 위한 수단이 필요합니다. 찾기만 하면 그 방편들은 수없이 많고, 길을 알려주는 선생(가이드)도 넘쳐납니다. 당신 주변에 편견이 없고 실패의 경험이 많은 나이 든 스승이..
외로움, 우울함, 두려움은 무엇이며,그것들의 출처(出處)는 어디인가? 단지 마음작용일 뿐, 한마디로 무지(無知)가 원인이다. 알아채는 순간 그것들은 연기처럼 사라진다. 그런 것들은 실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실존주의란 실재하지 않는 것에는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생각 태도를 말한다. 무엇이 實在인가? 실재가 존재하는가? 시간, 장소와 관계없이 존재하는 것만을 실재라 한다. 잠시 있었다가 곧 사라져 버리는 것은 실재라 하지 않는다. 그것을 허깨비라 부른다. 그렇다면 世上 모든 것이 비실재 아닌가? 실재는 분명히 존재한다. 실재를 확인한 것을 가리켜 "밝아졌다" 혹은 見性했다고 한다. 仙道는 實存主義다.
사회성이란 무엇인가? 복잡하게 생각지 말자. 단순하게 말해 그것은 내가 소중한 만큼 남도 소중하다는 것을 아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 석가, 공자를 막론하고 공통은 "내가 원치 않는 일을 남에게 하지 말라", "내가 원하는 것을 남에게 해 줘라"였다. 세상에서 가장 귀한 것이라 해서 그것을 황금률(黃金律)이라 부른다. 하지만 그것에도 자주 문제가 생긴다. 내가 원하는 것이 꼭 남들도 원하는 것일 수 없으며, 내가 원치 않는 것을 남들도 따라서 싫어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나와 남이 존재하는 한 갈등은 영원히 존재한다. 거기엔 善惡이 따로 없으며, 사랑과 자비는 단지 말일 뿐이다. 내가 손해를 본다고 생각하는 순간, 천사는 악마로 변한다. 깨달음이란 내가 있기 때문에 남도 있으며, 남이 없으면 나 역시 존..
믿음이란 확인이 불가능한 사항에 대해 실제성을 부여하는 것(바라는 것의 실상)이며, 나타나지 않은 것을 증거(보지 못하는 것의 증거)로 채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믿음은 스스로 선택했든, 타인에 의해 유도되었든 매우 주관적인 것이며, 설명이 불가능한 것에 대한 강요이다. 그 믿음이 혼자만의 것일 경우는 아무 문제가 없다. 하지만 그것이 타인에게 강요되는 절대적 信仰(우러러 받드는 믿음)으로 탈바꿈 되고나면 우리는 걷잡을 수 없는 수렁에 빠지게 된다. 나는 믿음을 신앙으로 바꾸는 자들을 잘 이해한다. 그것이 그들의 재산과 권력이 되기 때문이다. 그들은 믿음와 眞理를 동의어로 만들고, 신앙을 종교(宗敎)라 주장하지만 결코 믿음이 진리일 수는 없으며 신앙이 종교일 수는 없다. 우리는 무엇이든 믿을 수 있지만 ..
眞理는 모든 것이다. 진리에는 진리이고 진리 아님이 없다. 그러므로 이것은 진리이고, 저것은 진리가 아니라 하면 이미 그것은 진리가 아니다. 진리는 사랑이다. 진리의 눈에는 모두가 하나로 보인다. 진리는 시기 질투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는 다투지 않는다. 진리는 하느님이다. 진리에는 선악이 없다. 진리는 나누지 않는다. 그러므로 진리에게는 다툴 대상이 없다. 진리는 누구의 편도 들지 않는다. 모두가 그로 비롯되었으며, 모두가 진리이기 때문이다. 인간들이 문제다. 그들은 하느님을 욕보이고 있다. 언제나 하느님은 내편이고, 나의 믿음을 반대하면 그것은 하느님과 적이 되는 것이라 주장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그렇게 생각하는 당신에게도 벌을 주지 않는다. 하느님은 사랑이며 진리이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모든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