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주관과 객관, 둘의 공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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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관과 객관, 둘의 공존

thedaywemet 2026. 2. 21. 05:01

먼저 논리적으로 이해를 해보자. 깨달음은 결국 체험이라지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낭설일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무엇일까? 그것은 감지되는가? 목격되는가? 하지만 감지되고 목격된다면, 그것은 객체(3인칭)이지 주체(1인칭)가 아니다. 그렇다면 주체가 곧 아상, '나의 이미지(그림자)'란 말인가? 그건 문자 그대로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 같다고 하는 것이니 말이 안 된다.

아상은 주체가 아니므로, 주체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더라도, 아상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아상이란, 주체의 소유격으로 설명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이미지, 나의 이름 등). 아상을 주체화하지 않으려면 아상의 착각을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기(현재 아상이 자기가 주체라고 착각하는 상황) 객관화와 관찰 능력이 필요하다. 주체를 찾기 이전에 적어도 아상을 주체로 착각하지는 말아야 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점은 아직 스스로를 찾지 못한 주체의 선택과 전제다. 주체는 객체처럼 포착되진 않지만, 주관이라는 기능(선택과 의미부여)으로 드러난다. 따라서 주체는 어떠한 믿음도, 생각도 선택할 수 있다. 주관(주체의 시각)이 스스로 "미약하다"고 믿는다면 객관의 시각에 의존하게 된다. 객관의 시각에서, 형태가 있는 모든 것은 사라지고 일시적이며, 세상의 아주 작은 한 조각에 불과한 것이 거의 절대적 사실이다. 본래 객관은 낙관이든 비관이든 의미부여를 하지 않지만, 주체(주관)가 능동적 의미부여를 하지 않으면 객관적 사실은 중립임에도 비관과 염세로 해석되기 쉽다.

모든 의미 부여는 주체(주관)의 몫이다. 방향을 선택할 수 있는 것은 주관의 역할이며, 주관이 능동적이기 위해서는 에너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에너지가 없으면 선택은 ‘능동’이 아니라 ‘반응’으로 굳고, 그때 우리는 삶을 단지 생노병사로 요약해 버리기 쉽다.

주관이 부족하면 남의 삶을 살게 되고, 객관이 부족하면 교감 없는 삶을 살게 된다. 두 시각이 맞물릴 때, 조각난 삶의 퍼즐은 맞춰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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