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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진리(眞理)는 깨닫는 것이다.진리는 믿는 것이 아니며, 믿을 필요도 없다.진리는 누가 믿든, 믿지 않든, 진리이기 때문이다. 믿음이란 진리와는 아무 관계가 없다.믿음이란 지금, 여기가 아니라 과거나 미래 검증이 불가능한 것이다.사실이 아닌 것에 대한 마음의 다짐, 그런 것을 믿음이라 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믿을 수 있다. 돌로 만든 상(像)을 믿고, 쇳덩이를 믿고, 개를 믿고,코끼리를 믿고, 뱀이나 쥐를 믿기도 한다. 진리를 깨닫는다는 것은 자기를 알아채는 것이다.내가 없으면 하늘도 땅도, 하느님도, 깨달음도 없기 때문이다.

예수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간단하게 이야기한다. 그것이 많은 지식인이 예수를 따르는 이유다. 예수처럼 '해탈(자유)'을 쉽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도 내가 바로 진리라고 했다. 내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싯다르타는 명쾌했다. 그것이 그의 위대성이다. 그는 무상, 고, 무아라는 간단한 이치를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만 살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무상(無常)이 고(苦)를 낳지만, 무아(無我)라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불교는 너무 복잡하다. 파벌도 파벌이지만, 가르침도 상이하다. 간단히 無我라 알고 살면 쉬울 것을, 힌두로부터 진아(아트만)와 윤회를 끌어들인 것으로 부족해, 용수(龍樹)의 중관(中觀)에 요가로부터 유식학(唯識學)까지 가져왔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신앙할 것인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 미궁(迷宮) 속에서 쉼 없이 허덕일 것인가라는 기로(岐路)에 서야 한다. 진리는 쉽고도 명료해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깨달은 이에게는 끄달림(苦)이 없다. 그는 진실(眞實)이 아닌 것들에 대해 관심을 두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오직 진리(眞理)에만 관심이 있다. 진아(眞我)는 오온(五蘊)에 속하지 않는다. 그는 그와 세상을 나누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에게는 갈등도 없다. 우리의 고통은 분별심 때문이며, 에고가 만드는 비교하는 마음, 호(好)불호(不好)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에고는 허깨비다. 그것은 연기(緣起)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무너지게 되어 있다. 진아(眞我)는 자체로 완벽하다. 그것은 무엇과도 연기하지 않으며, 무엇에도 속하지 않는다. 그것은 불생불멸(不生不滅)이다. 단지 존재하며, 단지 지켜볼 뿐이다. 깨달은 이는 진아와 에고, 절대 의식과 상대 의식의 진실을 알고 있다. 그러..

眞理는 손대지 않아도 진리입니다. 진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믿든, 믿지 않든, 그대로인 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지금 이대로'가 바로 진리입니다. 예수는 "진리가 나희를 자유케 한다(요한 8:32)"고 했습니다. 眞理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특정한 장소에 가야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지금 여기 오롯이 살아 있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진리다(요한 14:6)"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그가 진리이고, 바로 당신이 진리입니다. 眞理는 성직자의 말 속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당신 속에... 아니, 바로 당신이 진리입니다.

사실(事實)에 준하여 생각하고 말해야 합니다. 하지만 시간과 장소에 따라 달리 말하거나, 암시 혹은 돌려 말해야 할 때도 있습니다. 사실임에도 그것이 듣고 싶지 않거나, 불편을 느끼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 이가 곁에 있을 때는 가급적 삼가서 말해야 합니다. 그것을 사회성이라고 합니다. 때로는 거짓말이 필요할 때도 있습니다. 피해를 주지 않는 그런 것을 '하얀 거짓말'이라고 합니다. 그리고 내가 알고 있는 정보가 모두 진실은 아닐 수 있습니다. 늘 크로스 체크(cross-check)하는 습관을 들여야 합니다. 나도 모르게 가짜 뉴스를 전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신문이라 해서 100% 믿어서는 안 됩니다. 신문도 장사입니다. 그들도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내용을 싣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수행(修行)..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동일하게 진행된다. 자본주이냐 사회주의냐, 개인소득중심경제냐 전체소득중심경제냐, 수구(守舊)냐 개방(開放)이냐 등등 말이다. 그것은 신앙(信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독(基督)을 말하자면 구교(舊敎), 신교(新敎), 불도(佛道)라면 상좌부(上座部), 대승(大乘) , 아니면 선불교(禪佛敎), 이슬람이라면 시아파, 수니파로 나누어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사람은 완전한 깨우침을 얻기 전에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도록 구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열반(涅槃)과 해탈(解脫)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자. 이 사안(事案)은 전에도 다룬 적이 있으나, 엄연히 다른 두 단어의 의미..

"나는 양심에 거리끼는 행동을 한 적이 없다.", "양심에 걸려서 거짓말을 못 하겠다.", "나는 양심상 그를 죽일 수 없어.", "그것은 개인의 양심 문제야.", "그것이 그의 양심이라면, 나는 비양심이란 말인가?", "양심적으로 살아!" 이 말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우리의 양심이 무엇을 가리키는지 잘 알 수 있습니다. 국어사전은 良心을 "사물의 가치를 변별하고 '자기'의 말과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판단하는 도덕적 의식"이라 정의합니다. '자기'를 중심에 두고 있군요. 맞습니다. 양심은 거의가 개인적입니다. 검사는 검사의 양심이 있고, 변호사는 변호사의 양심이 있습니다. 집단적 양심이라 할지라도, 개인을 벗어나지 못합니다. 충효(忠孝) 사상이나 신앙(信仰), 그리고 도덕적 윤리가 양심의 기준이 될 ..

진리는 영원합니다. 그것은 부처가 만든 것도, 예수가 만든 것도 아닙니다. 하느님이 없어도 2 × 2 = 4, 2 × 3 = 6입니다. 부처나 예수를 진리 앞에 두지 마십시오. 진리가 가려져 안 보일 수 있습니다. '부처를 죽이고 조사祖師를 죽이라(殺佛殺祖)'는 말이 있습니다. 그들 모두가 물러섰을 때 진리는 드러나기 때문입니다.

모두가 착하다면, 거기에 착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운 것, 그리고 깨닫기 어려운 것은 세상의 진리(眞理)는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전체를 보기 어려운 이유는 시각(視覺)이 편파 쪽으로 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자성(自性)을 보게 된다. 수행자는 종일 자기를 살핀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은 버린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중도(中道), 양쪽을 여의고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있음이 없이 없음은 있을 수 없고, 있음 역시 홀로 있을 수는 없음은 분명하다.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도(中道)이다. 하지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옳은 것 중에 그른 것이 섞여 있을 때, 더 큰 中道가 실현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