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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손가락

신수(神秀) 이야기

알아챔 2023. 2. 27. 13:04

육조단경(六祖壇經)을 읽으면 두 명의 수행자가 나온다.

한 명은 신수(神秀), 다른 한 명은 혜능(慧)이다.

 

깨달음에 대한 스승의 물음에 神秀는,

身是菩提樹 (신시보리수)

心如明鏡臺 (심여명경대)

時時勤拂拭 (시시근불식)

勿使惹塵埃 (물사야진애)

[몸은 깨달음의 나무요, 마음은 밝은 거울 바탕일세. 때때로 털고 부지런히 닦아서 때가 끼지 않게 하세]라 읊었고,

 

慧能은,

菩提本無樹 (보리본무수)

明鏡亦非坮 (명경역비대)

本來無一物 (본래무일물)

何處惹塵埃 (하처야진애)

[보리(菩提)에 본래 나무가 없고, 밝은 거울 또한 틀이 아닐세. 본래 한 물건도 없는데 어느 곳에 끼일 티끌이 있겠는가]라고 벽에 쓴 것으로 유명하다.

 

육조단경神秀의 이 게송(偈頌)을 점수선(漸修禪)이라고 근기(根器)가 낮다고 일방적으로 폄하하고, 慧의 단번에 깨달음을 얻는 돈오선(頓悟禪)이 수승하다고 평한다.

 

우리의 본래 마음(自性, 佛性)은 부처의 덕상과 지혜를 모두 구족하고, 청정한데 무엇을 따로 닦을 필요가 있냐는 주장이다.

 

우리나라 선가(禪家)에서는 아직도 육조단경에 나타난 잘못된 고정관념 때문에 神秀를 완전히 깨닫지 못한 덜떨어진 선사(禪師)로 인식하고 있다.

 

하지만 神秀는 덜떨어진 禪師가 아니다.

그것은 남종선(南宗禪)의 주장일 뿐이다.

 

神秀(606-706)50세에 5조 홍인(弘忍)을 만났고, 90세가 되어 측천무후(則天武后)의 초청을 받아 입궁하여 황제가 먼저 예를 올리는 여불(如佛) 대접을 받은 사람이다.

 

()나라의 정사인 구당서(舊唐書)를 비롯한 능가사자기(楞伽師資記)와 송고승전(宋高僧傳) 등의 여러 가지 자료에 의하면 5조 홍인대사의 동산법문을 이어받은 사람은 神秀이며, 그는 수() 나라 대업(大業) 2(서기 606) 하남성(河南省)에서 출생, 태어날 때부터 남달리 총명하였고, 신장이 크고 인물도 빼어나서 귀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는 상류층 가계의 출신이었다고 한다. 그는 13세에 출가하여 20세에 낙양 천궁사(天宮寺)에서 구족계를 받고 46세에 이르러 동산의 홍인대사를 참문(參問)하였는데, 홍인이 한눈에 큰 법기(法器)임을 꿰뚫어 알고 마음을 열어 지도하였더니 수년 만에 그의 깨달음은 진실의 경지에까지 이르렀다고 한다.

 

神秀는 훗날 장안(長安)과 낙양(洛陽) 두 나라의 법주(法主)가 되어 세분 황제의 국사(國師)로 지냈던 큰 인물이었다. 또한 나이 95세 때 측천무후의 부름을 받고 황실에서 보낸 종려나무 잎으로 지붕을 덮은 천자의 가마를 타고 입궐하면 무후는 엎드려 맞이하였고, 그가 입적하자 대통선사로 추증하고 당나라 제일의 문장가로서 현종 때 재상을 지낸 장설(張設)이 그의 탑비인 형주 옥천사대통선사비(荊州玉泉寺大通禪師碑)의 비문을 썼다고 한다.

 

근래에 와서 돈황에서 출토된 자료에서 神秀의 저술로 밝혀진 관심론(觀心論)이 발견되었는데, 그는 '불도를 수행함에 있어서 어떤 수행법이 가장 요점이 되는가'라는 문제를 스스로 설정하여 '관심일법(觀心一法)이 모든 불법수행의 성요(省要)이며, 일체법을 포괄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神秀는 불성(佛性)은 각성(覺性)이라 하고 불성을 자각(自覺)하고 타인에게도 깨닫게 하여 지혜의 명료함을 깨달으면 그것이 바로 해탈이라고 하면서 관심일법에 의해서 본래의 청정불성(淸淨佛性)을 자각하면 본래 갖추어져 있던 지혜에 의해서 오염된 마음(染心)의 두꺼운 구름을 걷어낼 수 있다는 해탈에의 실천적 구조를 '정염이심(淨染二心)'의 논리를 응용해서 체계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神秀의 북종선은 달마로부터 비롯된 심불기(心不起)의 선사상(禪思想)을 바탕으로 하여 동산법문에서 주장하는 일행삼매(一行三昧) 좌선의 실천과 수심설(守心說)을 한층 더 강화하고 발전시켜서 허공과 같은 청정한 정심체(淨心體)를 보라는 청정선(淸淨禪)을 확립함으로써 좌선종(坐禪宗)으로서 중국불교 초기 선종의 이미지를 정립하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측천무후(則天武后)가 사망(705)하고 신수를 지원하던 비호세력이 사라지면서 황실과의 관계도 소원해지기 시작했고. 바로 그 시기에 남쪽에서 달마의 법통임을 주장하면서 육조현창운동(六祖顯彰運動)을 주도하는 세력이 등장하는데, 바로 당나라 현종(玄宗) 개원(開元) 20(서기 732)에 활대(滑臺)의 대운사(大雲寺)에서 개설한 무차대회(無遮大會)에서 남종의 하택신회(荷澤神會)가 수많은 대중들이 모인 자리에서 '북종의 신수는 방계(傍系)이며, 남종의 혜능이 보리달마의 정법(正法)을 이은 조사'라는 선언을 했다.

 

이 사건을 '활대의 종론(宗論)'이라고 하는데, 신회(神會)가 공격한 것은 첫째, 달마(達摩)는 양무제(梁武帝)와 만났을 때 무제가 절을 짓고 부처님을 조성하는 등 많은 불사를 했다는 자랑에 '무공덕(無功德)'이라고 측천무후를 도왔으며, 둘째는 달마가 혜가(慧可)에게 법을 전할 때 함께 전한 그 가사(袈裟)를 홍인이 혜능에게 그대로 전했다는 것이다.

 

그런데 達磨梁武帝의 만남이나 慧可에게 법을 전할 때 가사를 함께 전했다는 전의부법설(傳衣付法說)은 조작이라는 이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 사건을 계기로 북종은 서서히 쇠퇴하고 남종은 점차 활기를 띠어 당나라 대력(大力) 13(서기 778) 국가에서 '조계혜능(曹溪慧能)을 중국 선종(禪宗)6조로 인정하게 되었으며, 하택신회는 제7조로 추앙받게 되었다.

 

북종의 神秀를 방계라고 공격한 신회(神會, 서기 684~758)는 한때 神秀의 문하에서 3년 동안 수행한 경력이 있는 사람으로서 뒷날 그의 스승이 된 혜능과 자신의 정통성을 주장하기 위해서 전날의 스승을 공격한 것이다. 그러나 신회도 뒷날 중국 선불교를 완성시킨 마조(馬祖)와 같은 걸출한 제자를 길러낸 남악회양(南嶽懷讓)에게 7조의 자리를 양보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신수 오도가/혜능 오도가(작성자 : 동양고전 강사 이대성)에서 부분 요약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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