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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손가락

왜 지는지 아는가?

thedaywemet 2020. 7. 18. 08:00

20대 초반, 일 때문에 세검정의 비구니 사찰을 드나들던 때의 일입니다. 점심때쯤 일이 끝나면 늘 아리따운 비구니가 점심상을 들고 들어왔었는데, 하루는 궁금했던 것(사실은 어리석은)을 물었습니다.

 

"어떻게 하다가 비구니가 되셨나요?"

 

그 소리를 들은 여승은 한심하다는 듯 눈을 내리깔고는,

"그런 건 물어보는 것이 아니예요!"이라고 답하였습니다.

 

나는 가슴이 쿵 내려앉았고, 너무나도 바보 같았던 내가 그 말의 의미를 알게 된 것은 그로부터 한참 뒤였습니다.

 

비구니들이 제일 싫어하는 가요는 송춘희 씨의 "수덕사의 여승"입니다. 궁금하시면 그 노래의 가사를 참고해 보세요.

 

무식한 꼰대들은 주로 연애를 실패한 여인들이나 비구니가 되는 줄 알고 있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나 역시도 그때는 똑같은 부류였으니 말입니다.

 

지금쯤 그 비구니는 깨달음(見性)을 얻었을까 가끔은 궁금합니다.

 

주변에 자기 일과 가족을 버리고 출가(出家)를 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몇십 년을 도(道)를 닦았을 텐데, 왜 아직도 우리와 다름없이 집착을 버리지 못할까 궁금하지 않습니까?

 

무어라 변명을 해도 소용없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을 위해, 왜 수련을 하는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영화 '고지전'에 나오는 대사 한 토막입니다. 인민군 장교가 포로로 잡힌 국군들 앞에 나서서 일갈합니다.

"너희가 왜 지는지를 아는가? 너희들은 왜? 무엇을 위해 싸우는지를 모르기 때문이다."

 

너무나도 충격적인 대사였습니다.

 

깨달음 공부를 한다는 사람에게 "발심(發心)하셨습니까?"라고 물으면 자신 있는 대답을 하는 사람이 매우 드뭅니다.

 

발심했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수행을 최우선으로 생각하겠다'는 각오이기 때문입니다.

 

사실상 발심만 되면 그것만으로 깨달음은 떼놓은 당상(堂上)입니다. 일반인들이야 돈 벌랴, 마님(남편) 눈치 볼랴, 아이들 챙길랴, 너무 바쁘니 이해(?)를 한다 하지만,

 

혜암 스님 말마따나, '공부하다 죽을 각오'를 지닌 비구(비구니)들이 선방(禪房) 몇십 철을 나고도 미견성(未見性)이라는 것은 아직 발심 전이라고 밖에는 생각할 수 없어 마음 한구석이 허전합니다. 

 

그들은 우리들의 지표이기 때문입니다.

 

근기(根器)가 약해서 그렇다고요?

그런 말씀은 말도 안 된다는 것쯤은 알고 계시겠지요?

 

혹시 이 글을 읽는 비구(비구니)님께는 외람되었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분발하시라는 뜻에서 드린 말이지, 결코 폄하하려는 의도는 없습니다.

 

제가 아직도 천방지축입니다. 넓으신 양해를 부탁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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