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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무아는 종종 깊은 깨달음처럼 말해지지만,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의 치명적인 문제를 안고 있다.우리는 이미 모두 “나”라고 말하며 산다.나는 보고, 느끼고, 생각하고, 선택하고, “나의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어떤 이론 이전에 주어지는 직접적인 사실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1인칭으로 살아간다.그런데 “나는 없다”라고 말하는 순간, 이 명제는 스스로를 붕괴시킨다.왜냐하면 그 말 자체가 이미 1인칭의 자리에서 수행되기 때문이다.‘나’가 없다면 누가 없다고 말하는가. 누가 깨닫고, 누가 수행하며, 누가 무아를 진리라고 주장하는가.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다.무아는 보통 이렇게 재해석된다.“고정된 자아는 없다.”그러나 이 역시 문제를 피하지 못한다.‘고정됨’이나 ‘변화’라는 말은 모두 어떤 대상을 ..
“절대자와 하나 된다”는 말을 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을 절대자의 죄인으로 규정하는 구조는 스스로 모순을 안고 있다.하나가 되라면서, 끝내 종으로 남으라고 요구한다. 이때 구원은 해방이 아니라 관계의 고착이다.많은 신앙은 자기들 나름의 믿음 체계를 진리라고 주장하지만, 실제로 작동하는 것은 소속과 복종의 구조다. 사람들은 구원을 찾는다고 말하지만, 먼저 얻는 것은 공동체 안에서의 안정과 역할이다. 이 안정은 기능을 한다. 그러나 기능은 진리가 아니다.진리라면 교단을 떠나 항상 진리여야 한다.특정 집단의 믿음을 받아들일 때만 성립하는 것은 진리라기보다 교리다. 자기들 내부의 확신을 진리라고 부른다고 해서, 그것이 곧 보편적 진리가 되는 것은 아니다.문제는 여기서 시작된다.신앙이 자기 존재의 회복으로 이어지지..
무아는 자기 존재를 약하게 만든다.특히 자기주장이 약하고 수동적인 사람일수록 무아를 해방이 아니라 도피처로 받아들일 위험이 있다. 자기 존재를 굳게 실감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너는 없다”는 말은 초월의 언어처럼 들릴 수 있지만, 실제로는 자기 삶의 중심을 더 흐리게 만들 수 있다.자기 존재를 굳건히 세우는 길은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다.자기를 지우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기 존재를 더 선명하게 실감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머리로만 “나”를 이해하려 해서는 안 된다. 호흡을 느끼고, 에너지를 느끼고, 그것을 스스로 운용하는 감각 속에서 살아 있는 1인칭의 자리가 다시 드러난다.우리는 이미 존재하지만, 그 존재를 자기 것으로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간다.생명력이 약할수록 주체는 흐려지고, 삶은 반응과 끌려다..
무아는 종종 깊은 진리처럼 말해지지만, 실제로는 증명된 진리가 아니라 하나의 믿음이나 교리에 가깝다.우리는 이미 모두 “나”라고 말하며 산다.나는 말하고, 느끼고, 선택하고, 움직이고, “나의 몸”, “나의 생각”, “나의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해석이 아니라 사실이다. 인간은 처음부터 1인칭으로 살아간다.그런데도 “나는 없다”라고 말한다면, 그 말은 처음부터 모순을 안고 있다.왜냐하면 없다고 말하는 그 말 자체가 이미 1인칭의 자리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나’가 없다면 누가 없다고 말하는가. 누가 깨닫고, 누가 수행하고, 누가 무아를 진리라고 믿는가. 이 질문은 피할 수 없다.물론 부정될 수 있는 것은 있다.몸, 감정, 생각, 이미지, 이름 같은 것은 모두 ‘나에 대한 상’일 수 있다. 그것들은..
나는 이 문제를 복잡하게 돌려 말하고 싶지 않다.우리는 이미 모두 스스로를 “나”라고 부르며 살고 있다. 나는 말하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선택하며, “나의 몸”, “나의 생각”, “나의 것”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단순한 언어 습관이 아니라, 우리가 실제로 살아가는 방식이다.그런데도 어떤 전통은 “나는 없다”, “무아가 진리다”라고 말한다. 그러나 이 말은 겉보기에는 깊어 보일 수 있지만, 그대로 받아들이기에는 분명한 문제가 있다.“나는 없다”는 말은 그 말이 성립하는 조건을 동시에 부정한다. 없다고 말하는 바로 그 자리가 이미 1인칭의 자리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언제나 어떤 입장에서 말하고, 판단하고, 부정한다. 그 입장을 완전히 제거한다면, 말 자체가 성립할 수 없다.물론 여기서 부정될 수 있는 것..
먼저 논리적으로 이해를 해보자. 깨달음은 결국 체험이라지만, 애초에 말이 안 되는 소리라면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라 낭설일 수 있기 때문이다."나"는 무엇일까? 그것은 감지되는가? 목격되는가? 하지만 감지되고 목격된다면, 그것은 객체(3인칭)이지 주체(1인칭)가 아니다. 그렇다면 주체가 곧 아상, '나의 이미지(그림자)'란 말인가? 그건 문자 그대로 서로 상반되는 개념이 같다고 하는 것이니 말이 안 된다.아상은 주체가 아니므로, 주체는 아직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겠더라도, 아상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여기서 아상이란, 주체의 소유격으로 설명되는 모든 것을 말한다(나의 몸, 나의 마음, 나의 이미지, 나의 이름 등). 아상을 주체화하지 않으려면 아상의 착각을 스스로 발견해야 하는데, 그러려면 자기(현재 아..
거의 모든 문제의 시작은 각자가 내가 누군지 모른다는 것이다. 나는 내 이름인가, 몸인가, 영혼(?)인가? 나의 이름, 나의 몸, 나의 정신은 나의 소유이므로 내가 아니다. 그것들에 소유격을 붙이는 1인칭 주어가 바로 나이다. 그러나 보통은 그 주어가 만들어 낸 나라고 하는 어떤 이미지를 나라고 생각한다. 거기에서 모든 고통이 시작된다. 나는 이래야 하고, 너는 저래야 하고, 세상은 그래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물론, 생각은 자유이고 우리는 어떤 생각도 품을 수는 있는데, 뿌리 깊은 착각을 진실인냥 꿈꾸고 있으니 헤어나오지를 못 한다.한번도 만나보지 못한 연예인을 이러쿵저러쿵 평가하는 것처럼, 스스로 만들어낸 자신에 대한 이미지만 보고, 평가하고, 기대한다. 인기 많은 스타가 대중의 사랑을 한몸에 받는..
비가 내리던 늦가을 저녁,산사 아래 작은 선방에 세 사람이 마주 앉아 있었다.난로는 꺼져 있었고,차에서 올라오는 김만이 방 안을 천천히 채웠다.첫 번째 사람 – 무아 수행자가장 먼저 입을 연 사람은 삭발한 중년 승려였다.눈빛은 맑았고, 말투는 조용했다.“나는 십오 년을 수행했습니다.”그는 찻잔을 내려다보며 말했다.“생각을 관찰했고, 감정을 흘려보냈고,마침내 ‘나’라고 할 만한 것은 없다는 걸 알았습니다.”그는 잠시 숨을 고른다.“분노도, 욕망도, 두려움도…모두 인연 따라 일어났다 사라질 뿐이더군요.”젊은이가 물었다.“그래서 지금은 괴로움이 없습니까?”승려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어딘가 비어 있는 미소를 지었다.“괴로움은 없습니다.다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습니다.”방 안이 잠시 조용해졌다.그의 말은 옳았..
명상은 마음을 비우는 기술이 아니라,지금 일어나는 것들을 속이지 않고 보는 태도다. 명상은 ‘집중’이 아니다.집중은 목적이 있다.잘 보려고, 잘 느끼려고, 잘 되려고 한다.명상은 반대다.잘되지 않아도 그대로 두는 것이다.흐트러지면 흐트러진 걸 보고,잡생각이 오면 “아, 왔구나” 하고 끝낸다.그래서 명상은 성공·실패가 없다.명상은 ‘무아 체험’이 아니다.無我를 느끼려고 해도이미 느끼는 주체는 세워둬야 한다.명상에서 중요한 건‘내가 사라졌나’가 아니라, 내가 언제 개입하는가이다.짜증이 날 때,판단이 튀어나올 때,의미를 붙이려 할 때—그 개입의 순간을 알아차리는 것,그게 명상이다.몸 없는 명상은 관념이 된다.숨, 자세, 긴장, 미세한 불편감.이게 없으면 명상은 생각 놀이가 된다.그래서 오래된 전통들은 공통으로..
주체적 단전은 주체적 자아와 함께 공존한다.그 존재는 인식 여부와 무관하게 언제나 유지된다.다만 의식이 외부에 매달려 있거나자기 안정이 확보되지 않은 상태에서는 그 작동이 드러나지 않는다.주체적 단전을 찾으려 하거나,만나려 하거나,확인하려 할 필요는 없다.의도를 두는 순간, 에고가 개입하며,그 결과는 대부분 왜곡이다.수련의 방향은 단순하다.자신을 안정시키고,기운의 막힘을 줄이며,불필요한 긴장을 해소한다.이 조건이 갖춰질 때,주체적 단전은 자연스럽게 작동 범위를 넓힌다.주체적 단전은불생·불멸·불구·부정·부증·불감의 성질을 지닌다.그러므로 감각적 성취나 체험으로 판단하지 않는다.그것은서 있으면서도 앉아 있고,잠자면서도 깨어 있으며,항상 움직이되 드러나지 않는다.주체적 단전은안·이·비·설·신·의의 변화에 직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