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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자기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경전(經典)을 끌어다 붙이고, 선지식(善知識)들 노래나 따라 부른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늑대가 어쩌다 호랑이 탈을 쓰고 있다 하여, 호랑이는 아닙니다. 토끼, 멧돼지가 나를 보고 도망간다 하여, 내가 호랑이는 아닙니다. 호랑이들이 나를 호랑이라 해줘야 비로소 호랑이인 것입니다. 혼자서 맥없이 깨달음을 과시한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 살펴봐도 한점의 의심도 없어야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다면 세상에 누구도, 심지어 석가모니도 깨닫지 못했다"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비로소 '깨달았다' 할 수 있습니다. 견성(見性)은 성(性)을 본 것(見)입니다. 性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를 수 있겠습니까? 한국 다르고, 미국 다를 수 있겠습니까? 성품(性品..
세간(世間)을 떠나서 도(道)를 논(論)한다면 반쪽짜리 견성(見性)입니다. 체험이 없는 미사여구(美辭麗句)는 사상누각(砂上樓閣)입니다. 이 몸과 숨을 무시하는 견성 역시 반쪽짜리 깨달음입니다. 에너지를 모르고 깨어있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 자리 생명(生命)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이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담배를 피워야 하고, 술을 마셔야 합니다. 담배가 나를 피우고, 술이 나를 마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말과 문자, 그리고 논리(論理)가 나를 굴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경전(經典)이라 할지라도 내가 굴릴 수 있어야 바른 경전입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혜안(慧眼)이 열리지 않고는 그 무엇도 불가능한 ..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것이 열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개안(開眼)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지성(知性)입니다. 그리되면 세상사에 끄달리지 않고 살게 됩니다. 고요함에 머무르는 공부를 아무리 오래 해도 소용없습니다. 허깨비를 허깨비로 아는 눈이 없으면, 멀쩡히 눈 뜨고 계속해서 코를 베이게 됩니다. 맨날 같은 단어나 되뇌이면서 벽을 보고 앉아 있거나, 숨만 바라보는 것으로는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결정적 뒤집기가 필요합니다. 시끄러움 속, 혼란 속에 부대끼고 살면서, 다각적으로 닦아야 제대로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 눈을 제3의 눈, 혜안(慧眼), 도안(道眼), 신안(神眼)이라 합니다. 눈이 열려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않게 됩니다.
개안(開眼)이란 혜안(慧眼)을 얻는 것이며, 그것을 이룬 후부턴 그 자리(本性)를 자유롭게 보면서 끄달림 없이 살게 된다.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만권의 책을 읽고 장좌불와(長座不臥) 백년을 한다 할지라도 開眼이 부족하면 회답이 없는 연애편지와 다르지 않다. "개장수를 하더라도 최소 개 목걸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견성을 원하는 이에게 개목걸이는 개안이다. 필수적이란 말이다. 개 목걸이가 있어야 개를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타르타는 위대하다. 그 이유는 깨달음이 없으면 오랜 세월 뼈를 깍는 노력도 결국 무소용이라는 것을 몸소 증명했기 때문이다. 깊은 선정과 설산의 고행도 그에게 자유를 주지 못했으며, 산을 내려와 몸을 추수리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