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태식 (15)
谷神不死
태식(胎息)은 원초적인 "숨"을 말하며, 명(命)공부의 백미(白眉)이다. 그것은 견성(見性) 이후에도 필히 이어져야 할 공부다. 그것이 없으면 성명쌍수(性命双修)가 불가능하며 공부 길이 점점 더 혼란스러워지기 때문이다. 깨달음이 오고나면, 보이고, 들리고, 느끼고, 드러나는 것들(見聞覺知) 모두가 그 자리(本來面目)의 알아챔으로 연결된다. 그러나 그것만으론 아직 아니다. 그것들(견문각지)이 모두 한통속이기는 하지만, 따로 따로 기능하고 있어서 끊김과 이어짐이 늘 교차하고 있다. 항상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는 것은 오직 숨(息) 뿐이다. 바로 생명(生命)자리이기 때문이다. 胎息이 꼭 필요한 이유는 그것이다. 태식은 내호흡(內呼吸)이며, 그것을 살려내면 따로 마음을 쓰지 않아도 저절로(無爲) 그 자리(本來面目..
피리를 불어 보았는가? 피리는 바람을 불어 넣으면서 구멍들을 열고 막으며 음의 높낮이를 조정하여 음악을 연주하도록 구조되어 있다. 기본적으로 구멍들을 열면 낮은 음이 나고 구멍을 많이 막을수록 높은 음이 나오지만, 공기 주입구에서 먼 곳을 막으면 낮은 음이 나오고 가까운 곳을 막으면 높은 음을 낼 수 있다. 선가(仙家)에는 "공부(功夫)가 무르 익으면 구멍없는 피리를 불게 된다"는 말이 있다. 입문(入門)하여 축기가 어느 정도(百日蓄氣) 되면 단전(丹田)이 깨어나게 되며, 그때부터는 단전으로 호흡을 하게 된다. 단전호흡은 숨을 들이고 낼 때 단전에 에너지(氣)를 축적시키는 호흡으로, 단순한 복식호흡과는 내용이 전혀 다르다. 단전호흡에 정성을 들여 호흡의 안정을 이루게 될 즈음 소주천(小周天)이 일어나게 ..
견성보다 득명 仙道는 견성(見性)보다 득명(得命)에 더 정성을 들인다. 견성은 무위법(無爲法)이지만, 득명은 유위행(有爲行)에 의해 얻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견성을 위해선 애를 쓸 필요가 없다. '견성은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는 말이 있듯이...사실상 말 몇 마디에도 알아챌 수 있는 것(言下大悟)이기 때문이다. 너무나 당연한 것이어서 많은 사람이 관심을 기울이지 않고 있을 뿐, 이미 모든 사람이 깨달아있다. 견성을 하는 과정에서 대부분의 사람은 전신에 흐르는 강한 기운을 감지한다. 그것은 이제부터는 득명공부에 관심을 가지라는 하늘의 계시이다. 견성과 득명은 동반관계이므로, 견성 이후 득명까지 이루어야 제대로 된 완성이라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견성을 미루고 득명공부를 먼저 하기도 하지만 견성..
영생불사는 생자(生者)의 염원이며, 역사 이래 수없이 언급되어 온 것이다. 서선(西仙)으로 일컬어지는 예수의 말이다."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 (요한 11:25,26) 내용이 구체적이다. 그러나 의문을 남겼다. 그것은 '나'가 누구이며, '믿음'이란 무엇인가라는 숙제다. 그건 나중에 따지기로 하고... 아무튼 그는 육체를 확인시켜 줄 정도로 부활했다고 기록은 전한다. 그러나 그 '나'는 이 땅에서가 아니라 영혼이 하늘나라에 가서 산다고 가르쳐 왔다. 왠지 모자른 변명같고 떨떠름한 것은 나만의 생각일지도 모르지만...하지만 너도 모르고 나도 모르고...그들의 믿음이 의심스럽지 않을 수는 없다. 믿음이 있는 자는 땅에서..
선도(仙道)는 기(氣) 공부를 중시한다는 점에서 外道(佛道, 儒道, 基督)들과 차별된다. 기는 만물을 살아있게 하는 원동력으로 그것의 적절한 운영으로 만물은 생장하고, 그것이 다하면 아무리 견고했던 것이라 하더라도 맥없이 스러지고 만다. 사람이 살아있다는 것은 몸과 마음 그리고 기(에너지)가 흩어지지 않고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증거이다. 그 셋 중 하나라도 부실하거나 분리되면 우리는 정상적인 생명활동을 유지할 수 없다. 생명의 핵심은 기이다. 그것이 몸과 마음을 연결하는 활력소이며 우리를 살게하는 주체이기 때문이다. 제아무리 고도의 정신세계와 강건한 육체를 가졌다 할지라도 기(에너지)가 떨어지면 그것은 더 이상 사람이 아니다. 죽음이란 기의 기능이 정지되어 정신은 허공에 흩어지고, 몸은 분해되어 흙으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