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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자. 그럴 수 있는 힘을 기르자.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솔직할 수 있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에게도 솔직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보는데 왜 남의 눈이 필요한가? 무엇이 두려운가? 자기 자신에게만이라도 솔직해지자. A를 A라고 말하고, B를 C라고 말하지 말자. 과감히 벗어나 보자. 배고프면 배고프다 하고, 졸리면 졸립다고 말하자. 주입받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자. 가식을 모두 벗어버리자. 세상의 생각은 세상의 생각이고, 순간순간 아닌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당신은 깨어난다. 그리되는 순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진짜 자기를 만나게 된다. 자유를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갈구한다. 자유 도덕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 무엇에도 의지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숭배와 복종은 인간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숭배하고, 스스로에게 복종하도록 구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숭배와 복종은 사이비(似而非)들이 장삿속으로 요구하는 일이다. 그것에 맥없이 응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숭배와 복종에 순치(馴致)되는 것은 스스로의 존엄(尊嚴)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개개인은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존재이다. 무엇에도, 신(神)이나 부처라 할지라도, 그것에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
사후의 세계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마음에 담아 믿고 사는 사람도 있다. 사후를 주장하는 그 사람이 정말 죽음을 알고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이다. 죽음 뒤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를 각색하는 것이다. 열반(涅槃)을 위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어서 지옥을 피하기 위해 공덕을 쌓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꿈을 좇고 있을 뿐, 자기가 누군지 그 당체(當體)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실재(Reality)요,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끄달림들을 벗어나게 하고, 당장 극락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주체(主體)이니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더 나아지기를 원합니다.하지만 게으른 자는 불안한 변함보다는 일없는 안정을 더 선호합니다. 누구나 마음만 바꾸면 자기를 더 낫게 바꿀 수 있건만,마음은 바꾸려 하지 않고, 바꾸지 않을 핑곗거리만을 생각합니다. 불안해서 진취적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진취적이 못 되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불안해서 자기를 바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자기를 바꾸지 않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변하세요, 고정관념에서 나오세요. 거기에 자유가 당신을 기다립니다.
수행자와 일반인의 차이는 생각에 있다. 수행자는 자기 생각을 자기가 하고, 일반인은 남의 생각에 의존한다. 수행자는 남의 생각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남의 생각에 좌지우지되는 순간, 그는 생각의 노예가 되고 만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초능력도 나온다.
진정한 자유를 얻기 위해서는 '나'와 '내가 아닌 것'부터 구별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는 내가 아닌, 나와 연관된 것들을 '나'라고 생각하고 산다. 그것은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이 늘어난다는 의미이며, 쓸데없는 것에 마음 끄달리며 살게 되는 원인이다. 우리가 깨달아야 하는 이유는 너무나 자명하다. 그런것들로부터 벗어나는 것이다. 깨달음을 얻고 나면 우선 내가 아닌 것들에 대한 집착이 사라지기 시작한다. 깜박깜박 속지만 곧 제자리로 돌아온다. 이 몸과 이 마음이 내가 아니란 것만 확실히 이해하고 나면 세상살이가 달라진다. 근심 걱정할 일들이 사라지고, 그렇게 한가할 수가 없다. 젊은 시절엔 혈기 오르는 대로 욕망을 따라 사는 것이 당연하다. 거쳐야 할 통과의례이고, 그것 역시 공부 과정의 일부분이니까 말..
본성(本性)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조건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하나같은 깨달음 속에서 늘 자유롭다. 사마디(Samadhi) 속에만 머물려는 사람이 있다.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로부터 성자(聖者) 소리를 들을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담배, 술, 마약, 채팅과 게임, 그리고 명상(?)을 통한 삼매(三昧)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을 좀 안듯 산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자연인)들도 너무 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편안함이 아니다. 특정 조건에서의 편안함이기 때문이다. 순경계(順境界)이든, 역경계(逆境界)이든, 가리지 않고 편안해야 바른 깨달음이다. 깨달은 사람은 굳이 무념무상(無念無想)조차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 속에서도 늘 자..
지혜자의 말을 꾸준히 듣다 보면, 마음속에 자리 잡아 나를 불편하게 했던 알 수 없는 것들이 무너져 내리는 체험을 하게 됩니다. 그후부터는 마음에 끄달림 없이 살게 됩니다. 그렇게 개운할 수 없고, 그보다 더 자유로울 수 없게 됩니다. 나에게 부담을 주고 나를 괴롭히던 온갖 것들이 없어지고, 그냥 자연스럽게,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게 됩니다. 똑같이 해 뜨고 저녁 오지만, 똑같이 사람들 만나고, 하던 일하고, 아름다운 미래를 구상하며 살지만, 더 이상 헛된 것에는 속지 않고 살게 됩니다. 무너져 내린 것은 허깨비 같은 생각들과 알음알이입니다. 그런 것들은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런 상태를 가리켜 바른 견해의 회복,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자기에게 관심을 가지면 누구에게나 당연히 있어야 할..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때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과 있었다가, 대상이 사라지면 어디론가 숨어 버립니다.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또한 수련에 의해 깨끗하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체적으로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과 하나 되면 세상 부러운 것이 없이 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도인(道人)이라 부릅니다.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렵고도 쉽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것과 하나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자유가 아니면 죽음을 달라"는 말이 있었던가? 하지만 사람들은, 불편할까 혹시 손해는 보지 않을까, 두려워서 自由(깨달음)를 포기한다. 아무도 그들의 자유를 구속하는 사람은 없다. 스스로 만든 Matrix(그물망) 속에 스스로 들어간다. 그러고는 그곳에서 나오려 하지 않는다. 바깥세상은 위험하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들은 스스로를 묶고 스스로 자기를 구속하는 철창 속에 들어간다. 그고는 거기서 주는 찌꺼기를 먹고 산다. 아주 적은 용감한 사람만이 다수의 비웃음과 우려에 개의치 않고, 그곳으로부터 탈출한다. 무지(無知)한 자가 비웃지 않는 도(道)는 道가 아니다. (老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