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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깨달음을 구하는 사람은 깨달음만 있으면 만사가 형통할 것으로 믿고 있다. 그러나 깨닫고 난 사람들도 조만간 다시 부족함이 생겨나는 것을 안다. 늘 말하지만, 이(理), 즉 성(性)은 기(氣)가 작용을 해줘야 제대로 행세가 가능하다. 불도(佛道)에 심취하여 있는 사람에게는 아무리 성명(性命)에 대하여 이야기해 줘도 무아(無我), 연기(緣起)만을 반복하여 말할 뿐이다. 그들을 억지로 설득하려 들지 말라. 하지만 그가 일단 깨달음을 얻고 나서 그것이 무미건조하다는 것을 알았을 때, 스스로 알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깨달았어도 여전히 삶이 녹록지 않고, 소화불량에 순환장애, 혈당 불균형이 지속되는 것을 보면서 말이다. 배가 고프면, 우선 밥부터 먹어야 한다. 아무리 밥은 실재하지 않는 것이라고 외쳐봐야, 아무 ..
마술사는 Trick을 쓴다. 그는 그만의 Knowhow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그는 절대로 그것을 공개할 수 없다. 그것이 그의 밥벌이의 도구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스승은 있는 그대로를 공개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친절한 설명을 이해할 수 없다고 한다. 그들의 사물 바라보는 법이 다르기 때문이다. 마술사는 눈속임에 능하다. 하지만 스승은 절대 누구도 속이지 않는다. 스승은 모든 것을 공개한다. 그것도 아주 쉽게... 하지만 사람들은 그 이치를 알지 못한다. 그리되는 이유는 알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발기수기발이승(理發氣隨氣發理乘)"이라 했습니다. 理(性)는 氣가 없이는 유명무실(有名無實)합니다. 이(理)는 기(氣)가 있어야 행세를 합니다. 氣에 무관심하면, 단지 관념(觀念) 놀이에 그치고 맙니다. 역사상 理가 단독으로 무슨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그 뒤에서 있는 듯, 없는 듯, 氣가 도왔기에 행세를 한 것입니다. 언어(言語), 문자(文字)에 머문 깨우침(義理禪)이 아니라면, 깨달음과 동시에 강한 기감(氣感)을 동시 체험합니다. 그것이 아니라면 이제라도 氣 공부를 시작해야 합니다. 氣는 존재를 지키고, 깨달음을 지키는 수호신입니다.
논리(論理)로 열심히 무아(無我)를 설득하는 노인을 보았다. 모든 작용(作用)은 연기(緣起)에 기초하므로, "나"라는 것은 존재치 않는다는 것이 요지(要旨)였다. 젊은이는 자신의 체험을 내세우며 그 노인의 변(論)을 반박하고 있었지만, 노인은 중간에 말을 끊는 화법으로 그의 주장에 대응하고 있었다. 論理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생각의 산물이다. 그것이 진리는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에 절대성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장하는 자의 생각에 따라 좌지우지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논리 뒤에는 그것을 펼치고 있는 무엇인가가 있다. 그것이 논리를 만들고 수정한다. 논리는 조작이며, 허깨비이다. 깨우치려면 논리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것 앞에 논리는 힘이 없다. 그것을 만나면 논리..
깨달음이 올 때 대부분의 사람은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막혔던 氣가 열리기 때문이다. 강한 기감(氣感)을 느끼기도 하고, 氣가 전신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깨우침이 몸속 기운을 깨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치(理致)로 알음알이만을 키운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깨우침은 머리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초견(初見)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어두워지는 이유는 에너지와 연결을 못 했기 때문이다. 깨우침과 氣(小周天)를 동시에 얻은 사람은 그다음부터의 공부가 점점 더 재밌고, 풍요로워진다. 그런 사람은 나머지(補任) 공부를 수월하게 하게 된다. 氣의 작용이 그 자리가 흐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도(仙道)에서 "본성(本性)과 에너지를 동시에 닦으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