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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깨달은 자는 남들이 자기를 몰라준다고 해서 개이하지 않는다. 너무나 당연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는 개인적인 생각을 넘어서서 사물을 바라볼 줄 안다. 이른바 이치에 입각한 객관적 사고이다. 그는 혼자여도 외롭지 않으며, 불안하거나, 우울하거나, 두렵지 않다. 그는 사물을 직시(直視)하며 살기 때문이다. 외롭거나 불안, 우울, 두려움은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기 때문에 생긴다. 자기를 주시(注視)하는 순간, 그런 것들은 즉시 사라지고 만다. 그는 자연 친화적이다. 자기확대를 하여 산이나 물, 나무나 돌과도 친구가 된다. 그는 늘 필요한 만큼만 소유하며, 그것으로 자족(自足)하며 산다. '지도무난(至道無難)'이라 했다. 깨달음은 어렵지 않다. 자기 주시가 바로 되는 순간, 깨달음은 즉시 온다.
외로움을 호소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자신과의 대화 시간이 적은 사람이다. 꼭 마음 맞는 사람과만 대화가 되는 것은 아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허물이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이다. 우선 나의 호불호(好不好)를 점검해 본다. 그리고 왜 나는 그것을 좋아하고, 왜 싫어하는지 질문해 본다. 왜 그 음식을 좋아하는지, 왜 그 사람에게서 매력을 느끼는지, 특히 남의 말이나 글을 읽을 때, “핵심이 무얼까?”를 자신에게 물어본다. 여태 생각하던 대로, 살던 대로 생각하고 살려고 하지 말라. 자기와의 대화를 시작할 때는 먼저 심호흡을 다섯 번쯤 하면 좋다. 그래야 깊이 있는 대화가 가능하다. 매력 있는 대화의 출처는 그의 내면세계다. 대화가 잡사(雜事)에만 그쳐서는 안 된다. 나는 무엇에 가치를 주고 사는지, ..
불안의 원인은 뇌의 회로에 문제가 생긴 것이라는 보고가 있다. 유물론은 마음을 인정하지 않으며, 당연히 불안을 뇌(腦)의 문제로 생각한다. 하지만 인간에게 뇌보다 중요한 것은 마음(心)이며, 그것이 사고작용을 모두 감찰한다. 지식은 뇌의 소관이지만, 지혜는 마음의 영역이다. 지식은 더하는 것이 만들고, 지혜는 빼어낼수록 증가한다. 외로움, 불안, 우울, 두려움은 뇌의 문제가 아니라, 마음의 문제다. 물론 몸과 마음은 하나로 뭉쳐있지만 말이다. 마음이 깨어나게 해야 한다. 문제의 실마리는 마음에 있다. 불안의 원인 역시 마음속에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귀여운 아기를 자랑삼아 안고, 업고 다니던 시대는 이제 지났다. 이제는 유모차 안에도 개가 들어 있다. 애완견이 슬그머니 반려견으로 바뀌었다. 개가 그들이 상전이 된 지도 오래다. 사람보다 더 고급 음식을 드시고, 한 달에 한 번은 미용실도 다니신단다. 마당 귀퉁이에 살게 하고, 비 맞히며 음식 찌꺼기나 먹여 기르던 시절이 엊그제인데 말이다. 개를 가족이라 불러도 개는 개다. 꼰대 소리를 듣겠지만, 개가 사람보다 상좌에 앉아서야 쓰겠는가? 그만큼 외롭고 마음 붙일 데가 없다는 이야기인가? 아니면 평등심의 발로인가? 아직도 개새끼는 욕인데, 개 엄마, 아빠가 자랑스러운가? 미안치만 나로선 도통 이해가 안 되는 일이 지금 벌어지고 있다. 외로움이 문제는 문제지만, 내 안에 있는 각기 다른 여러 명의 나와 대..
날씨가 흐리고, 바람 불고, 비가 와도, 상공(上空)은 구름 한 점 없이 맑습니다. 더러는 외롭고, 우울하고, 두렵고, 화가 나는 날이 있기도 하겠지만, 그것들의 밑에 자리 잡은 본마음은 티 하나 없이 순수합니다. 외롭고 우울할 땐 숨을 길게 내쉬어 그것들을 뿜어 내세요. 두렵고 화가 나면 가만히 마음의 밑바닥을 들여다보세요. 맑디맑은 본마음이 드러날 테니까...
돈이 있어도, 지위가 있어도, 왠지 무언가가 빠진 것 같고, 외롭고 우울해지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돈과 지위가 없어 불안하다면 이해가 되지만, 있을 것 다 있으면서도 여전히 만족함이 없으니 이 노릇을 어찌합니까? 그런 일은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에 일어납니다.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니 돈이 있어도 내 것이라 할 수 없고, 지위(地位) 역시 내 것이라 말할 수 없습니다. 눈에 보이는 것, 귀에 들리는 것, 마음속의 느낌들은 모두 내 것이 아니며, 당연히 이 몸과 마음 역시 나라고 할 수 없다면... 그러면 나는 누구입니까? 한시도 떨어져 있지 못하면서도, 무슨 일을 하던지 항상 같이하면서도, 그것이 나인지를 모르고 살고 있으니 환장할 일 아닙니까? 그러니 허전하고, 외롭고, 우울함이 가시지 않는 것입니다.
무엇이든 한 가지만 잘하면 된다. 근사하게 양말을 만들 줄 알든, 스테이크를 잘 굽든... 청소를 잘 하든, 가진 재능으로 남을 행복하게 해 주든, 그것 하나만으로도 충분히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그래도 허전함이 사라지지 않는다면 한발 물러서서 바라보라. 자기관조, 단전호흡, 선도(仙道) 공부에 몰두해 보라. 생명과 영원성을 알게 될 터이니...
혼자 있어서 외로운 것이 아니다. 혼자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외로운 것이다. 이유가 있어서 우울한 것이 아니다. 스스로 자기를 챙기지 않기 때문에 우울한 것이다. 실제로 무서운 것이 있어서 공포스런 것이 아니다. 자기가 만든 쓰레기에 두려운 이미지를 씌워놓았기 때문이다. 죄(罪)라는 것이 따로 있는 것은 아니다. 자기 마음이 만들고 스스로 죄인이라고 자책(自責)을 하는 것이다. 그 모든 것을 갈아엎고 싶다면 자기가 누군지를 알아채면 된다. 여태까지 모르던 새 세상이 펼쳐질 것이다. 그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역사 이래 외로움은 언제나 우리 옆에 있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그것의 진정한 정체가 무엇인지 알려고 하지 않고 막연하게 그것을 피하려고만 해왔습니다. 우리는 분명 그것으로부터 달아나려고만 애쓰고 있는 것 같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두려워합니다. 그래서 나 아닌 가면을 쓰고 타자들의 배경 속에 자신을 감춘 채 그것이 드러나지 못하도록 애를 씁니다. 그것은 특별한 사람의 전유물은 아닙니다. 행복해 보이는 사람도, 불행한 사람도, 맹렬한 활동가도, 학문, 예술에 몰두해 있는 사람들도 외로움 속에 있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속성인지도 모릅니다. 아무리 감싸보려 해도 감싸지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직시(直視)하려 하지 않고, 그것을 이해하려고 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단지 그것으로부터 도망칠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