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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모든 일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꺼진다. 조건이 있으면 있고(살고), 조건이 없으면 없다(죽는다). '연기(緣起)'를 말한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기운이 잘 통하고 실(實)하면 건강하고, 기운이 불통(不通)하고 부실(不實)하면 병들고 죽는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에너지(氣)이며, 인간 생명은 에너지와 의식의 콜라보(collaboration)에 의해 유지된다.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살아선 정기신(精氣神)의 조화요, 죽어선 에너지(氣)와 의식(神)을 어찌 계합(契合)하고 운영하느냐이다. 세상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유지되고, 쇠퇴한다.
태어나는 순간, 생존 의식 외에 거기엔 아무것도 없다. 오직 생존을 위해 더 유리한 것만을 구하도록 조정되어 있다. 생각과 행동 역시 그것에 의해 우선순위가 정해진다. 젖을 빠는 것으로 시작되어 그 일은 평생동안 지속된다.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른지는 중요하지 않다. 오직 무엇이 지금의 나에게 더 유리한가에 기초하여 그에 준한 말과 행동들이 나오게 되어 있다. 신앙이란 것도 별것이 아니다. 신앙 행태를 보라. 겉으로는 사랑과 자비를 외칠지 몰라도, 그 뒤를 보면 이기주의와 반목, 폭력이 난무한다. 극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믿음이 다소 제 자리를 찾기도 하지만, 절대다수의 사람은 아직도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는다. 내가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인지, 진리인지도 모르는 채 말이다. 나는 무엇을 믿는가? 나는..
말 한마디도 조심해야겠습니다. 그것이 큰 파급을 불러오기 때문입니다. 2500년 전 시타르타의 "무아(無我)"라는 말 한마디 때문에 매우 시끄럽습니다. 그의 "연기(緣起)"라는 존재관(存在觀)에서 비롯하여 본래면목(本來面目)도 사실은 실재(實在)가 아니라는 주장이 생겨났습니다. "연생(緣生)은 무생(無生)"이라는 논리(論理) 때문입니다. 눈에 보이고, 들리면, 일단은 있는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옳습니다. 그것은 또한 보이지 않고, 들리지 않는 것이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입니다. 무아(無我)는 유아(唯我), 즉 진아(眞我)의 반증이 아닐까요? 죄 있다고 결론을 먼저 내리고 추궁하다 보면, 결국은 무죄(無罪)도 유죄(有罪)가 되고 마는 것이 세상입니다. 있는 그대로 보아야 합니다. 가설은 가설일 뿐입니다. ..
힌두이즘은 설명이 다채롭고 화려하며, 신비스럽게 포장되어 있다. 다양한 비유 및 상징, 힌두신들과 인간과의 교감, 감동적인 영웅의 서사시, 산야신들의 신에 대한 헌신, 깨달음이 인간 삶의 목적인 것, 그리고 깨달을 때까지 윤회하는 것 등, 수행자가 아닌 일반 대중을 그 사상(신앙) 속으로 끌어들일 수 있는 요소를 많이 가지고 있다. 그런 매력(?)을 지닌 힌두이즘을 Background에 둔 요가와 선도를 비교한다면, 선도의 첫인상은 다소 지루해(?) 보일 수 있을 것이다. 선도는 일견 무뚝뚝해 보인다. 보기에 따라서는 불친절하거나 퉁명스럽다고 느낄 수 있다. 설명이 군더더기 없이 절제되어 있어서 직접 체험이 없으면 그 맛을 알기가 수월치 않기 때문이다. 요가의 수행자는 '지복(Ananda)' 속에 있게 ..
한국어에서 단순히 '안다'로 말해지는 것에 대해 영어권 사람들은 know, see, get, have, understand, realization, cognition 등등 그 표현이 매우 다양하다. 여기서 know와 see의 차이는 하늘 땅 만큼의 차이가 있다. 하늘과 땅은 붙어 있어 사실상 구별이 모호하지만 그 둘을 하나라고 하는 사람은 없다. 우리는 보통 'I know'와 'I see'를 두리뭉실 혼용하지만 따져보면 그 차이가 천지보다 더 큼을 알게 된다. 같은 "안다"는 말이지만, know는 속세(俗世)의 표현법이고 see는 출세간(出世間), 즉 깨달음의 언어이다. 우리는 무언가를 볼(see)때 단순히 보지(just look) 않고 기존의 지식으로 여과하여 저장한다. 즉시 과거형으로 바뀌는 속도가 ..
마음 역시 氣인 까닭은? 마음은 생각, 감정(感情), 의지(意志), 그리고 지적활동의 주체(主體)이다. 마음은 그 모든 것의 바탕이 되지만 자성(自性)을 갖고 있지 못하며 실제로 그것들(受,想,行,識)을 주재(主宰)하지 못할 뿐더러 영향을 미치지도 못한다. 그것들 역시 자주적(自主的)이지 못하며 단지 연기작용(緣起作用)에 의해 일어나고 꺼질 뿐이다. 모든 존재는 에너지가 필요하며 마음 역시 氣가 받쳐주지 않으면 만유(萬有)의 바탕이 될 수 없다. 또한 그것들 역시 에너지(氣)가 없이는 활동불능(活動不能)이다. 氣가 있어 마음이 존재(存在)하고 일체(一切)의 마음작용 역시 氣로 인해 작동(作動)된다면 "마음 역시 氣(心即氣)"라고 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