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알아차림 (6)
谷神不死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 그것을 "인식(認識)의 주체(主體)"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알아차림 속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라.그것이 인식의 주체이다. 알아차림 속에 인식의 주체도 함께 있으니 말이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글과 친하지 못하게 한다. 마치 껄끄러운 사람을 멀리하는 것처럼... 세상엔 글쓰기를 하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이 있다.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자기와 더 가까이 있다. 글을 쓰려면 자기를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필히 글로 생각을 끌어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글 쓰는 능력이 생긴 후 글을 쓰겠다고 말하지 말라. 글을 쓰지 않고 글재주가 저절로 생기는 일은 없다. 글을 쓰다 보면 글이 마술을 부린다. 글을 통해 어렵다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 글은 곧 자기 관조(觀照)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알아차림이란 특별하지 않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종일이 알아차림의 연속이다. 꿈속에서도 알아차린다. 짧은 글이라도 매일 써보라. 알아차림을 글로 표현해 ..
우리는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생활 모두를 생각이 주도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느끼는 오감(五感)은 바로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거의 습관적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합니다. 그러나 생각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시 분별하여 행동의 지표가 되게 하는 생각과, 단지 '그렇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분별 작업은 입력(入力)된 Database에 근거하여 진행됩니다. 그리고 분류가 완료되었을 때, 비로소 안심합니다. 수많은 위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유위(有爲)라 하며,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그것의 뒤에는 항상 "나"라는 것(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내려놓은 생각입니다. 그..
첫 번째는 몸의 움직임에 마음을 모으는 주시자(注視者)가 되어야 한다. 걷거나 외단공(外丹功)을 진행하면서, 나의 몸 움직임을 관찰해보자. 알아차려 보자. 두 번째는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한다. 현재에 머무르는 데 매우 유효하다. 세 번째는 마음의 흐름을 관찰한다. 들떴는지, 고요한지, 무슨 생각들이 이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면 자아의 현주소를 알게 된다. 네 번째는 대상에 대한 반응을 관찰한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대상과 나와의 상관관계에 마음을 모은다. 나의 경향을 알고 안정된 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다섯째, 안다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관찰자로 관찰자를 관찰한다. 이제 자성(自我), 주인공의 정체를 알게 될 날이 머지않다.
자성(自性)은 무궁무진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알아차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가 모를 뿐, 그것에겐 우리에게 필요한 것, 모두를 이루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깨우쳐야 합니다. 수표를 단지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습(無用)니다. 하지만 수표의 기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무엇이든 필요한 물건을 구해 옵니다. 깨달음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느님(自性)을 알아챈 것이기 때문입니다.
수행 초기에는 수행의 주체가 ‘나’이다. 수행의 주체인 내가 수행의 ‘대상’을 관(觀)한다. 그러나 본성이 드러나는 순간 주체와 대상이 사라진다. ‘그 자리’에 들어가면 알고 모르고가 없다. 일체가 성품(性品)을 잃고 오직 인연생기(因緣生起)만 남기 때문이다. (만물은 자체의 성품이 없다) 오직 ‘알아차림’만 남는데 우리는 정확히 이것이 무엇인지 좀처럼 알기가 쉽지 않다. 안목이 열리지 않고는 거의 불가능한데, 눈이 눈을 볼 수 없듯 주체가 되는 이것은 의식의 대상이 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혹자는 이것을 ‘모를 뿐’이라 하였다. 한없이 펼쳐지는 적적한 그 자리에는 자타(自他), 선악(善惡), 내외(內外), 래거(來去)가 없다. 그것들(나와 너, 선과 악, 안과 밖, 오고 감)은 마음이 그렇다하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