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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마음이 '나'라 하면 마음이 내가되고 몸을 '나'라하면 몸이 내가 된다.여자라 하면 여자가 되고 철수라 부르면 철수가 된다.내가 없다하면 없을 것이고 있다하면 지금 '이것'이 내가 된다.꽃이라 불렀을 때 나에게 다가와 꽃이 되었다는 글이있다.당신은 당신을 누구라 명명(命名)할 것인가?먼지 만도 못한 존재?노예같은 피조물?신(神)의 아들(딸)?아니면 천상천하에 유아독존하는 존재?하나 골라잡아라.꽃이라 부르면 꽃이 된다.
‘알아차림’이란 말이 대유행이다.심지어 알아차림을 실존(實存)처럼 생각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알아차림 하나로 모든 것이 끝난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그것 역시 대상이 필요하다는 것을 사람들은 잊고 있다.그리고 알아차림은 원동력 즉 에너지 공급이 필수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에너지(氣)를 알아차리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를 살아가게 하는 것이 에너지이며 그것이 알아차림을 지속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기(氣)를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에 문제가 생기는 것이 병(病)이며 그것이 다하면 죽는다. 그것을 설명하는 것은 선도(仙道) 뿐이다. 하나로 모든 것을 설명하려 해선는 안된다..정기신(精氣神)이 모두 건강해야 우리의 삶이 즐겁다.

우리는 알아차리면서 삽니다. 색깔이 참 곱기도 하구나!어떻게 저런 신비한 소리가 날까?이 냄새가 무슨 냄새지? 바로 이 맛이야!뺨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아하! 이런 뜻이었구나 ! 이것은 우리의 일상사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어느 것 하나 붙잡지 못하고 그냥 지나치고 맙니다. 선도(仙道)를 하는 사람은 무엇을 알아차릴까요? 그들은 단전(丹田)을 알아차리고, 단전의 기운(氣運)을 알아차립니다.기운이 모이는 것을 알아차리고, 기운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것을 통해 선도인(仙道人)은 신선(神仙)으로 변해갑니다. 그 프로세스를 연정화기(鍊精化氣), 연기화신(鍊氣化神)이라 합니다.

"나는 없다"는 생각을 주입시키려는 사람들이 있다.그들은 깨어있다는 것이 '내가 없다는 것을 알아차리는 것'이라고 말한다.하지만 속지 말라.그들이 어떤 권위로 말한다고 할지라도 말이다.생각이 나인가?내가 없다면 누가 알아차린단 말인가?길을 걷다 보면 수많은 사람을 지나친다. 하지만 우리는 그들의 얼굴 모두를 기억하지는 못한다.그 이유가 내가 없어서였을까?그렇다면 지금 외출에서 돌아왔다는 것은 누가 아는가?깨어있다는 것은 보고, 듣고, 느끼는 이 신비한 존재가 있고 기능한다는 것을 알아차리며 산다는 것이다.두려워 말라.당신이 지지했던 지도자가 실각한다고 나도 함께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은 아니다.KOREA에 새 페이지가 열리고 있다.대문이 닫히면 창문이 열린다.창문 밖 풍경을 감상하는 나와 함께 말이다.

우리는 알아차리면서 삽니다. "색깔이 참 곱기도 하구나!" "어디서 이런 신비한 소리가 날까?" "이 냄새가 무슨 냄새지?" "바로 이 맛이야!" "뺨에 스치는 부드러운 바람... " "아하! 이런 의미였구나!" 너무나 당연한 우리의 알아차림(일상사)입니다. 하지만 그것으로 그만입니다. 남김없이 사라지고 맙니다. 선도(仙道)를 하는 사람은 무엇을 알아차릴까요? 그들은 단전(丹田)을 알아차립니다.단전의 기운(氣運)을 알아차립니다.기운이 모이는 것을 알아차립니다.기운이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립니다.그리고 기운을 내가 모으고 움직이는 것을 알아차립니다. 그것을 통해 선도인(仙道人)은 신선(神仙) 세계로 들어갑니다. 그 프로세스가 연정화기(鍊精化氣), 연기화신(鍊氣化神)입니다.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 그것을 "인식(認識)의 주체(主體)"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알아차림 속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라.그것이 인식의 주체이다. 알아차림 속에 인식의 주체도 함께 있으니 말이다.

글쓰기에 대한 두려움은 글과 친하지 못하게 한다. 마치 껄끄러운 사람을 멀리하는 것처럼... 세상엔 글쓰기를 하는 사람과 안 쓰는 사람이 있다. 글쓰기를 하는 사람은 자기와 더 가까이 있다. 글을 쓰려면 자기를 들여다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변화를 원하는 사람이라면 필히 글로 생각을 끌어내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글 쓰는 능력이 생긴 후 글을 쓰겠다고 말하지 말라. 글을 쓰지 않고 글재주가 저절로 생기는 일은 없다. 글을 쓰다 보면 글이 마술을 부린다. 글을 통해 어렵다는 자기 자신을 볼 수 있다. 글은 곧 자기 관조(觀照)라 해도 과언은 아니다. 알아차림이란 특별하지 않다. 잠에서 깨는 순간부터 종일이 알아차림의 연속이다. 꿈속에서도 알아차린다. 짧은 글이라도 매일 써보라. 알아차림을 글로 표현해 ..

우리는 생각 없이 살아갈 수 없습니다. 우리 일상생활 모두를 생각이 주도합니다. 보고, 듣고, 냄새 맡고, 맛을 알고, 느끼는 오감(五感)은 바로 생각으로 이어집니다. 거의 습관적입니다. 그것을 가리켜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합니다. 그러나 생각에도 두 가지가 있습니다. 즉시 분별하여 행동의 지표가 되게 하는 생각과, 단지 '그렇구나' 하는 생각입니다. 분별 작업은 입력(入力)된 Database에 근거하여 진행됩니다. 그리고 분류가 완료되었을 때, 비로소 안심합니다. 수많은 위험을 체험했기 때문입니다. 그것을 유위(有爲)라 하며, 그것이 갈등의 원인이 됩니다. 그것의 뒤에는 항상 "나"라는 것(생각)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또 하나의 생각(?)이 있습니다. 그것은 "나"를 내려놓은 생각입니다. 그..

첫 번째는 몸의 움직임에 마음을 모으는 주시자(注視者)가 되어야 한다. 걷거나 외단공(外丹功)을 진행하면서, 나의 몸 움직임을 관찰해보자. 알아차려 보자. 두 번째는 일어나는 느낌들을 관찰한다. 현재에 머무르는 데 매우 유효하다. 세 번째는 마음의 흐름을 관찰한다. 들떴는지, 고요한지, 무슨 생각들이 이어지고 있는지 살펴보면 자아의 현주소를 알게 된다. 네 번째는 대상에 대한 반응을 관찰한다. 보이고, 들리고, 느껴지는 대상과 나와의 상관관계에 마음을 모은다. 나의 경향을 알고 안정된 나를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다섯째, 안다는 것들을 모두 내려놓고, 관찰자로 관찰자를 관찰한다. 이제 자성(自我), 주인공의 정체를 알게 될 날이 머지않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