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논리 (5)
谷神不死

잘 싸우는 사람은 상대의 힘을 역이용한다. 상대의 무기로 상대를 공격한다. 논쟁(論爭)할 때는 먼저 상대의 말을 경청하고, 그의 말을 수긍해 줘라. 말을 많이 하면 쓸데없는 말도 하게 마련이다. 논리적으로 하자가 없다고 그에게 부드럽게 말하라. 능숙한 토론자들은 중간중간 상대에 대한 칭찬을 아끼지 않는다. 그리하면 상대는 허점(급소)을 보이게 마련이다. 상대보다 말을 적게 하면서 숨으로 상대의 기운을 단전(丹田)으로 끌어들여라. 한 호흡 쉬고 상대가 했던 말 중에 앞뒤가 맞지 않는 점을 찾아내라. 그것을 잡아 간단히 질문 형식으로 짧게 추궁하라. 미소 지으며 분명하게 말하라. 전세(戰勢)는 당신 쪽으로 넘어오게 된다.

선도(仙道)는 견성(見性) 같은 것으로 유난을 떨지 않습니다. 애쓰지 말고(自然無爲), 잠시 생각만 내려놓으면 드러나는 것이 자성(自性)이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 어려운 이유는 쓸데없는 것(교리)을 만들어 그것에 꿰어 맞추려 하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이란 벌거벗은 임금님 동화와 비슷합니다. 사람들, 특히 뭘 좀 안다는 사람일수록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아이처럼 가식 없이 보면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自性이니 말입니다. 한 번도 변한 적이 없었던 그것, 늘지도 줄지도 않고, 善하지도 惡하지도 않은 그것, 쓸데없이 이해할 필요도 논리와 합리로 꿰맞출 필요도 없는 그것,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습니다. 생각을 내리고(Don't think) 그냥 보면(Just look) 바로 볼 수 있는 것이 自性입니다..

요즘 하느님(JMS)의 출현으로 새삼스레 세상이 떠들썩하다. '신앙(信仰)'은 시작부터 불합리한 구조이다. 그러므로 거기서 '합리(合理)'를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마치 개가 사람처럼 두 발로 걷는 것과 같다. 개는 네 발로 걸어야 편하다. 신앙은 그냥 신앙하면 된다. 신앙(信仰)은 종교가 아니다. 신앙이란 단지 몸 바쳐 믿어(信) 우러르기(仰)만 하면 된다. 그 앞에 '신학(神學)'은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그것엔 논리(論理)도, 이치(理致)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좀 바람직하진 않아도 그냥 아무 생각 없이 믿으면 된다. 생각이 일어나는 순간 그것은 신앙이 아니니 말이다.

논리(論理)로 열심히 무아(無我)를 설득하는 노인을 보았다. 모든 작용(作用)은 연기(緣起)에 기초하므로, "나"라는 것은 존재치 않는다는 것이 요지(要旨)였다.젊은이는 자신의 체험을 내세우며 그 노인의 변(論)을 반박하고 있었지만, 노인은 중간에 말을 끊는 등의 화법으로 그의 주장에 대응하고 있었다. 論理라는 것은 무엇인가? 그것은 진리는 아니며 생각의 산물일 뿐이다. 그러므로 그것에 절대성을 두어서는 안 된다. 그것은 주장하는 자의 생각에 따라 좌지우지 되기 때문이다.논리 뒤에는 그것을 펼치고 있는 에고가 있다. .논리는 조작이며, 허깨비이다.그것이 논리를 만들고 수정하기도 한다깨우치려면 논리가 아니라, "존재" 자체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한다. 그것 앞에 논리는 힘을 잃는다. 논리는 녹아 없어지고, ..

세간(世間)을 떠나서 도(道)를 논(論)한다면 반쪽짜리 견성(見性)입니다. 체험이 없는 미사여구(美辭麗句)는 사상누각(砂上樓閣)입니다. 이 몸과 숨을 무시하는 견성 역시 반쪽짜리 깨달음입니다. 에너지를 모르고 깨어있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 자리 생명(生命)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이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담배를 피워야 하고, 술을 마셔야 합니다. 담배가 나를 피우고, 술이 나를 마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말과 문자, 그리고 논리(論理)가 나를 굴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경전(經典)이라 할지라도 내가 굴릴 수 있어야 바른 경전입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혜안(慧眼)이 열리지 않고는 그 무엇도 불가능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