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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권세가 있는 사람도, 돈이 없는 사람도, 학식이 있는 사람도, 무식한 사람도, 욕심 많고 악한 사람도, 하느님이 있다고 믿는 사람도, 죽으면 그만이라는 사람도, 세상 사는 데는 모두 동일하다. 하지만 꼭 알고 살면 편리한 것이 있고, 모르고 살아도 되는 것이 있다. 꼭 알아야 하는 것은 자기(自己)와 기운 기르기이고, 나머지는 살아가면서 저절로 알게 된다. 자기를 알고, 기운 기를 줄을 아는 사람은 세상을 즐기며 활력 있게 살지만, 자기를 모르고, 기운 모으는 법에도 무식한 사람은 세상에 질질 끌리며 패배감 속에 산다. 하느님과 진리는 몰라도 그 두 가지만 알면 삶이 만족스럽지 않을까?

"학교폭력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학교를 없애는 것이다"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적 모순 속에서 삽니다. 석가는 "'나'라는 것은 없다"라는, 이전에 없던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체가 고통(一切皆苦)이라고도 말합니다. 없는 '나'에 어떻게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인간은 신(神)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어떤 일을 당해도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사랑이다"라고 뇌까리며 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너무 잔인합니다. 그의 자식들의 편을 가르고 한 놈은 천당, 한 놈은 지옥으로 ..

수행자(특히 인도 수행자)가 苦行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업(Karma)을 털어내기 위해 그리한다. 싯다르타도 처음엔 그들을 따라 산에 올라 오랜 시간 고행(苦行)을 해 뼈와 가죽만 남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총명함은 그것이 고(suffering)를 소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苦를 소멸시키는 원리를 깨달았다. 그의 알아낸 것은 내가 없다면 苦가 있을 수 없다는 원인무효법, 즉 무아(無我)이다. 그것은 불교의 기둥 교리가 되었다. 그 말대로라면 모든 것은 허망하다. 우리는 어떤 노력(수행)도 할 필요가 없다. 산다는 것이 코미디이다. 그들의 말은 다분히 논리적이어서 반박에 쉽지 않다.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논리적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없는가? 그것은 그치지 않을 토..

중병(重病)으로 회생(回生)이 어렵다고 판단되면 연명치료를 거부하고 조용한 곳으로 물러가 곡기(穀氣)를 끊어 생(生)을 마감하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그리고 그때부터가 진짜 '알아채기' 공부가 됩니다. 방해받지 않고 몸과 마음, 호흡의 변화를 확연히 읽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곡기를 끊으면 온몸의 통증들이 사라지고, 불안과 공포가 없는 상태가 됩니다. 후천(後天)에서 얻은 기운이 선천(先天)의 기운으로 바뀝니다. 그때부터는 자성(自性) 자리가 더욱 빛나게 됩니다. 사람에 따라 다르지만 그렇게 세상을 버리는데 보통 100일 정도가 걸립니다. 천천히 삶의 흔적들을 지우고 선계(仙界)로 옮겨가게 됩니다. 그때 거리낌이 없는 천국(극락)이 체험됩니다. 이것이 수행자의 마지막 바람직한 모습입니다.

열반(Nibbana)은 모든 불교도가 바라는 기독교의 천국과 같은 것이다. 그들은 그것을 인간이 성취할 수 있는 최고(신비)의 경지, 즉 완전한 고(Suffering)의 해결 자리로 보고 있다.그러나 열반(涅槃)의 의미는 생명의 불이 꺼진 상태, 즉 소멸(消滅), 멸절(滅絶)이다.싯다르타의 깨달음은 "'나'라는 실체가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는다(諸法無我)"는 것이었다.'나 없음(無我)'을 불교에서는 움직일 수 없는 진리(三法印)로 받아들인다.싯다르타는 그것을 알아챔으로 고민하던 생사(生死) 문제를 해결했다고 공언했다.하지만 무조건적인 믿음을 내려놓고, 니체처럼 생각이란걸 해보자.과연 그의 깨달음의 요체, 존재하지 않는 것에 고통이 있을 수 있는지?또한 깨달음은 얻지 못했다 할지라도 죽어서 몸이 사라진 사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