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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것이 열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개안(開眼)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지성(知性)입니다. 그리되면 세상사에 끄달리지 않고 살게 됩니다. 고요함에 머무르는 공부를 아무리 오래 해도 소용없습니다. 허깨비를 허깨비로 아는 눈이 없으면, 멀쩡히 눈 뜨고 계속해서 코를 베이게 됩니다. 맨날 같은 단어나 되뇌이면서 벽을 보고 앉아 있거나, 숨만 바라보는 것으로는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결정적 뒤집기가 필요합니다. 시끄러움 속, 혼란 속에 부대끼고 살면서, 다각적으로 닦아야 제대로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 눈을 제3의 눈, 혜안(慧眼), 도안(道眼), 신안(神眼)이라 합니다. 눈이 열려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않게 됩니다.

명상 중 하느님(?)을 만났습니까? 가슴이 뻥 뚫리는, 허공(虛空)과 내가 합해지는 체험을 했습니까? 그리고 나선 생각과 생각 아님을 구별하는 눈이 생겼습니까? 그런 상태를 '눈을 떴다'는 뜻의 '개안(開眼)'이라고 합니다. 눈이 생기지 않았다면 아직은 아닙니다. 눈이 밝아지지 못하다면 공부를 좀 더 해야 합니다. 그 눈으로 진리(眞理)를 보았다면 한번 말해 보세요. 그 진리란 놈이 어떻게 생겼습디까? 운전자가 되어야 합니다. 운전자는 산도 보고, 강도 보고, 다리도 봅니다.
우리는 두벌의 시각기능(視覺機能)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육안(肉眼)이요, 다른 하나는 심안(心眼), 즉 내부 시각 능력이며, 이것은 내부 오감의 기능을 함께 갖는다. 육안과 심안의 다른 점은 육안은 동일 시공의 것만을 볼 수 있다는 것이고, 심안은 시공을 넘어 미지의 세계로 넘나든다는 것이다. 육안은 거의 에고의 지배를 받으며, 십중팔구 '탐심(貪心)'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정신력을 원하거나 깨우침을 추구하는 사람은 심안을 이해하고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정신세계와 친하려면 일단 몰입(沒入)이 필요한데, 그것은 심안과 불가분의 관계를 맺고 있기 때문이다. 몰입과 삼매는 연기(緣起) 관계이며, 따라서 심안과 삼매(三昧)도 서로 동조하는 조화가 있다. 그러므로 삼매에 들으려면 심안이 살아나야 하며, 삼..
개안(開眼)이란 혜안(慧眼)을 얻는 것이며, 그것을 이룬 후부턴 그 자리(本性)를 자유롭게 보면서 끄달림 없이 살게 된다. "천사의 말을 해도 사랑이 없으면 소리나는 구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말이 있듯, 만권의 책을 읽고 장좌불와(長座不臥) 백년을 한다 할지라도 開眼이 부족하면 회답이 없는 연애편지와 다르지 않다. "개장수를 하더라도 최소 개 목걸이 하나는 있어야 한다"는 말도 있다. 견성을 원하는 이에게 개목걸이는 개안이다. 필수적이란 말이다. 개 목걸이가 있어야 개를 끌고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시타르타는 위대하다. 그 이유는 깨달음이 없으면 오랜 세월 뼈를 깍는 노력도 결국 무소용이라는 것을 몸소 증명했기 때문이다. 깊은 선정과 설산의 고행도 그에게 자유를 주지 못했으며, 산을 내려와 몸을 추수리고..
견성(見性)은 성품(性品)을 보는 것(見)이다. 고로, 보는 기능(개안; 開眼)이 필요하다. 도안(道眼), 심안(心眼), 혜안(慧眼), 신안(神眼), 천안(天眼), 불안(佛眼)이라 하는 안목(眼目), 그것 말이다. 그 눈은 내외(內外)나 시간과 공간에 구애받지 않고, 무엇이든 보고 들을 수 있는(觀自在; 관자재) 축복 중 축복이다. 하지만 중생(衆生)들의 눈과 귀는 그 초점이 외부(外部)로만 맞추어 있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다. 기독(基督), 힌두, 불도(佛道) 가릴 것 없이 그 많은 수행자들이 평생 애를 써도 견성 이루기가 그리도 어려웠던 이유는 눈(眼識; 안식)을 안으로 되돌리는 것(回光返照; 회광반조)에 대해 무지(無知)하고 서툴기 때문이다. 알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