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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수행을 위해서는 일단 잡념의 통제가 필요하며, 수행자는 인연 따라 각기 자기 기국(器局)에 맞는 것을 선택하게 되어 있다. 특정한 어휘(呪文과 챈팅)를 외운다거나, 일정한 동작(3000배, 수피댄스)을 반복, 그리고 호흡의 관(觀), 간화선(看話禪) 등 명상이라 불리는 여러 가지 것들이다. 그중 어떤 것도 순수의식(Samadhi)으로 연결되는 다리 역할을 한다. 인간의 일체의 행위는 남김없이 깨달음으로 연결되어 있다. 물론 수행의 의지가 있는 사람에 한하겠지만, 하늘의 섭리가 아닌가 생각한다. 해인총림의 조실(祖室), 성철스님은 화두(話頭)가 여여(如如)한지에 중점을 두어, 오매일여(寤寐一如), 몽중일여(夢中一如)를 주로 물었다고 한다. 법거량(法巨量)을 통해 가늠하는 전통을 버리고 말이다. 선도(仙道)..

시심마(是甚麼 :이 뭣고?), 삼서근(麻三斤), 정전백수자(庭前柏樹子:뜰앞 잣나무)를 단순한 말이나 염불(念佛)로 생각해선 안됩니다. 몸(가슴)과 마음 어느 구석에 걸려서 뿌리치기 어려운 조건이 되지 못한다면 화두(話頭) 로서 가치가 없습니다. 선도(仙道)의 소주천(小周天) 공부 역시 간단하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삼관(三關)을 통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소주천을 진행하다가 꼬리뼈(尾閭)에서든, 등 중앙(脊中)에서든, 대추(大椎)에서든, 氣가 걸려 꼼짝없이 흐르지 못하면 오히려 즐거워해야 합니다. 수행을 지속하는 한, 조만간 열리게 되어있기 때문입니다. 맥(脈)이 뚫려 나갈 때의 그 개운함이란 무엇에도 비기기 어렵습니다. 그것을 깨달음(밝음)이라 할 수는 없지만, 그것을 계기로 하여 점점 밝아지게 됩..

화두(話頭)를 보는(看) 것을 통해 성품(性品) 자리에 이르는 수행법을 간화선(看話禪)이라 하고, 단전(丹田)을 지키는 것을 통해 밝음자리에 통하는 방편을 意守丹田이라고 한다. 선도(仙道)를 단지 불로장생을 꾀하는 방술(方術)이라고 오해하는 사람이 많지만, 그것은 전체에 대한 식견 부족 때문이다. 성품을 깨우치는 일은 모든 인류 모든 종파에 골고루 분포되어 있다. 기독교에도 나름 관상법(觀想法)이 있으며, 거경궁리(居敬窮理)라는 훌륭한 공부가 유교(儒敎)에도 있다. 간화선의 시작은 조사선(祖師禪)이다. 처음엔 스승이 직접 그 자리(本來面目)를 가리켜 깨우쳐 주던 것에서 제자가 많아지자 형편상 화두라는 방편을 사용하지 않았나 추측하고 있다. 선도는 성품자리에 이르기 위해 길잡이역으로 에너지(氣)를 사용한다..

묵조(默照)란, "묵묵하게 비춘다"는 의미가 있다. 여기서 묵묵하다는 것은 생각을 내려놓는다는 뜻이다. 간화선(看話禪)의 무자(無字) 화두(話頭)나 수미산(須彌山), 방하착(放下着)이 하나같이 생각을 내려놓는 방편이라는 입장에서 본다면. 묵조선(默照禪) 역시 폄하 받아서는 안 된다고 본다. 유명한 조사선(祖師禪) 교사 한 분은 망상(妄想)이 생길 때마다 무릎을 탁 치는 것으로 깨어있음을 회복한다고 한다. 행법들을 비교해 보면 默照禪은 상당히 우아한 참선법(參禪法)이라는 생각이 든다. 선도(仙道)가 흐르는 氣를 인지하는 것(의수단전)으로 본래면목(本來面目)과 계합(契合)하듯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