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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손가락

철학자와 성인

알아챔 2023. 3. 18. 06:16

철학자(哲學者)와 성인(聖人)의 차이는 시간과 공간 속에 있느냐, 그것을 벗어났느냐에 있습니다.

시간과 공간을 내려놓았을 때, 자연스럽게 우리는 생각과 언어까지 넘어서게 됩니다.

삼법인(三法印)은 철학자의 영역입니다. 조금만 생각을 진행해도 '"나"라 할만한 것은 없다(無我)', '모든 것은 변한다(無常)', 그리고 '결국은 고통이다(一切皆苦)'라는 것을 이해할 수 있으며, 사성제(苦集滅道)와 연기(緣起)도 추론(推論)이 가능합니다.

싯다르타는 어찌하여 최고봉이라는 무소유처정(無所有處定) 비상비비상처정(非常非非相處定)을 버리고 6년의 고행(苦行)길을 떠났으며, 나중에는 도반들의 질시를 무릅쓰고 그것마저 내려놓았을까요?

지금의 Hindu의 Swami들도 싯다르타가 보리수나무 아래 앉기 전 그의 행적(수행과 고행)을 답습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Hindu의 法이기 때문입니다.

苦行을 포기하고 목욕과 여인의 우유죽으로 자신을 달랜 싯다르타에게 새벽별은 어떤 의미였을까요?

그 사건 이후 그는 과거(바라문)를 넘어서 聖人으로 새롭게 태어났습니다.

그것은 그에게 어떤 깨달음의 확신(見性)을 주었을까요?
부모미생전본래면목(父母未生前本來面目)에 대한 깨달음이 아니라면 무엇이었겠습니까?

1700 공안(公案)의 뒤에는 무엇이 있을까요?

혜능(慧能)의 "견성(見性)만 말할 뿐, 선정(禪定)도 해탈(解脫)도 말하지 않는다"는 무슨 뜻일까요?

그 당체(當體)가 세간(世間)에 끄달리지 않게 해주고 마음속으로부터 그치지 않는 기쁨과 감사를 쉼 없이 피어나게 해준다면, 초기 불교의 無我라는 신조(信條)가 무엇을 목적하여 정립(定立)되었는지 다시 공부해 봐야 하지 않을까요?

若見諸相非相卽見如來!!

나중에 깨우침의 當體가 착각이었다는 것이 검증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만약 無常, 苦, 無我만이 眞理라면, 더 이상 이 허망(虛妄)한 人生을 지속할 이유가 있을까요?

이 장난 같은 삶을 말입니다.

허망관(虛妄觀)을 주장하다 자살로 생을 마감한 日本의 "무묘앙에오"처럼 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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