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오지도 가지도 않는 자리 본문
佛家의 공부는 공도리(空道理)를 깨우치는 것이라 한다. 굳이 색즉시공(色卽是空)이나 범소유상 개시허망(凡所有相皆是虛妄) 같은 경전 말씀을 채용하지 않더라도 착(着)을 버리는 순간, 우리는 오온(五蘊)이 空함을 체험하기 때문이다.
仙家의 공부를 佛家 입장에서 본다면 着을 버리지 못하는 공부다. 바탕은 虛(空)함에서 시작하나, 여전히 色의 세계를 즐기며 살고있기 때문이다.
佛法의 見性은 간단히 말해 性品을 보는 것이요, 누구나 알고자 하기만 하면 단박에 깨우치는 공부라면, 비록 깨우침이 있었다 할지라도 여전히 몸과 마음을 놓지 못하는 공부가 仙法이다.
공도리를 깨우치기 위해선 어떠한 노력도, 수련도 필요하지 않다. 그것은 여기 이대로 완벽하게 있는 것이 '그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仙家의 경우 비록 깨달음이 있었다 할지라도 가야할 길이 아직 남았다. 命功을 마저 닦아야 하기 때문이다.
비유하여 여전히 산은 변함없이 산이고 물은 역시 물이다.
그렇다보니 여전히 산에 길을 내고, 나무를 심어야 하고, 제방을 쌓아 물길을 돌려내고, 그 위에 배를 띄울 수 밖에 없다.
사실상 정진(精進)이란 말은 불도에는 어울리지 않는다. 없는 것을 만들어 내는 것이 아니고 얼룩을 닦아 낼 필요도 없이, 있는 그대로의 "그것"만을 확인하면 더 이상은 할 일이 없는 것이 불법공부(見性)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선도는 다르다. 선도는 정기신(精氣神) 공부다. 살아있는 동안 몸(精)의 기운을 관리해야 하고 죽음 이후를 대비하여 에너지(氣)와 識(神) 공부(精進)를 게을리 해서는 않된다.
선도는 공즉시색(空卽是色) 공부요, 보이고 들리는 것들을 소중히 생각하는 공부다. 그것들 하나 하나가 모두 나와 다르지 않음을 알아가는 점수행(漸修行)이다. 담박 無爲에 들지 못하고 有爲를 통해 無爲에 도달하는 공부이다.
어느 쪽이 옳고 그른지 시비는 잠시 보류하도록 하자. 어느 쪽이 선택되더라도 우리 모두는 자신의 성향이나 인연을 따라 흘러갈 수밖에 없을 것이고,
결국은 있음도 없음도 아닌 자리, 오지도 가지도 않는 자리, 空도 아니고 色도 아닌 그 자리(性命双修)에 우리 모두는 함께 앉게 될 것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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