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見性을 체험하고 난 후 본문
깨달음을 얻고 나면 삶에 끄달림이 없어진다. 세상사가 그저 한편의 영화를 보는 것 같아진다. 마치 바람이 불고, 천둥 번개가 쳐도, 전쟁으로 도시가 폐허가 되고, 떼죽음이 일어나도, 그것이 영화 스크린(screen)에 스크래치(scratch) 하나 만들지 못하고, 나는 그저 안락한 의자에 앉아 팝콘을 먹고 있는 것처럼...
깨달음이란 내가 사라지는 것(我空)이고, 세상도 사라져(法空), 텅 비고 고요함만 남는 것이다.
그 후엔 의욕이 사라지고, 무엇 하나 갖고 싶은 것도, 무엇 하나 되고 싶은 것이 없는 마음상태, 일 없는 편안함...그것이다. '나'라는 것이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란다.
붓다는 "나는 苦와 그 至滅에 대해서만 말한다" 하였으며, 평생동안 팔만사천에 이른다는 해결책을 내놓았다.
과연 얼마나 많은 佛者들이 그를 따라 해탈(大自由)을 얻었느냐에 대해선 나중에 이야기하도록 하고...
오직 모를 뿐, 모두가 부처라 하였으니, 일단은 모든 이가 깨달았다 간주하고, 누구라도 앞에 묘사된 '열반'의 상태가 자신에게 영원히 지속된다면 그것에 만족할 수 있는지, 솔직한 심정을 묻고 싶다.
열반(해탈)을 마치 불이 꺼진 식은 재와 같다고 표현했으며, 그것은 나라는 개체가 허공에 산산히 흩어지는 것이라 했다.
물론 지금 이것 저것에 시달리고, 하는 일마다 실패를 거듭하고, 가족을 비롯한 모든 이가 나를 무시하는데다가, 몸이 여기 저기 쑤시고, 잠도 못자는 그런 형편이라면 모를까,
개똥밭에 굴러도 이생이 좋고, 산 개가 죽은 정승보다 낫다 했는데, 정말로 숨이 끊기고 이 몸이 썩어져 다시는 이 세상을 영원히 보지 못한다는 것을 누가 담담히 받아들일 수 있을까?
그리고...이미 열반의 상태가 이루어져 그것이 당연한 일상이 되어 살고 있다면 어떨까?
직장을 구하기 위해 몇 년을 고생하다가, 그럴듯한 영구직 자리를 구한 사람은 뛸 듯이 기쁠 것이다. 하지만 그 만족감이 얼마나 오래가는지 아는 사람은 다 안다.
집이 없어 어렵게 지내다가 고생 끝에 편한 평수의 아파트를 분양받게 된 사람은 아마도 세상을 다 얻은 것 같은 마음일 것이다.
그러나 얼마간의 시간이 지나면 그 기분이 사그라들면서 다시 불만이 고개를 들고, 또 다른 한단계, 더 높은 요구가 생기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것이 인간이다.
혹시라도, 나라는 존재 전부가 연기처럼 남김없이 흩어진다는 것에 조금이라도 마음에 쓰인다면, 그리고 개시허망(皆是虛妄)을 알아채고, 즉견여래(即見如來)를 한 그 놈(깨달음)을 향후 어찌해야 하는지가 궁금하다면 우리 좀 더 이야기를 나누는 것이 좋지 않을까?
소위 깨달았다는 사람으로부터, "無我만이 옳아", "이것만이 진리야", "이것 밖에 없어, 이것이 모두야"라는 말을 심심치 않게 듣는다.
과연 그럴까? 잘라 말하건데, '이것만이 진리'라 하는 것은 이미 진리가 아닌데 말이다.
2×2=4, 2×3=6이란 것이 과연 우주 저편에서도 진리로 남게 될지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열반, 천국이 정말 있더라도 우리는 가고, 가고, 또 가야한다. 그것이 이치이고, 내 부족한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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