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늘 지복 가운데 있다? 본문
우리가 흔히 쓰지는 않았고, 주로 힌두 신앙자들이 주로 쓰는 말이었는데, 오늘날엔 도판(道板)에서 흔하게 들을 수 있는 말이 있습니다.
지극(至極)한 福이란 뜻의 "지복(至福; ananda)"이라는 말로, "나는 누구인가?"의 라마나 마하리쉬도 자주 하는 말입니다.
늘 至福 가운데 머물러있다고 주장하는 분을 만나보고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인도의 성자로 꼽히는 라마크리슈나라는 이가 늘 그 상태에 머물렀다고 전해지고 있지만, 진위는 떠나서 솔직히 저는 식사도 잊은 채 그 상태에 머물러 있어 혹시라도 죽을까 봐 물을 입에 떠 넣어 주었다는 이야기가 그리 감동적이지는 않습니다.
至福은 박복(薄福)에 대별되는 말로서, 박복이 없다면 至福이란 말은 성립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언어 인플레이션이 아닐까요? 아니라면 깨달음이란 걸 과대 포장하기 위해 만든 말이든지 말입니다.
인도에 가서 인도 문화도 접해보고 불경을 읽으며 가늠도 해 보았지만, 그들은 무언가 엄청난 과장(overstatement)이 필요한 민족이 아닌가 생각도 들었습니다.
실제 거리에는 거지 떼가 넘쳐나고, 온통 길바닥이 발 딛기 어려울 정도로 소똥으로 널려 있는 곳에.. 성스러운 어머니라는 강가(River Ganga)는 똥물투성이고, 델리 공항은 스모그가 심해 항공기가 자주 회항을 해야 하는 그곳, 그곳을 어머니 품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많습니다.
깨달음이란 것이 그리 대단한 건 아닙니다. 늘 지극한 福 가운데 머물러 있는 것도 아니고, 거기에도 역시 바람도 불고 비도 옵니다.
그냥 근심 걱정의 실체를 알게 되어 이제는 전전긍긍하지 않고 살게 되었을 뿐입니다. 그 정도면 살만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붓다는 "나에게 다른 건 기대하지 말고, 오직 고통(苦)과 그 해결책(solution)에 대해서만 물어보라" 했던 겁니다.
진정 至福 가운데만 머물러 있음이 분명하다면, 더 이상 이 세상에서 지지고 볶고 살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우리 백두산족은 우리일 뿐입니다. 이해도 어려운 그들(인도나 중국)의 말을 따라 하지 않아도, 우리끼리도 충분히 행복하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우리 언어로 우리식 깨달음을 이루며 사는 것이 어떻겠습니다.
물론 노망난 제 개인의 뇌피셜입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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