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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는 말이 있다. 철학을 한다는 모모의 서양 사람들이 무아(無我)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게 맛(?) 정도는 알고 그리 말하는지 안쓰러운 감이 든다. 無我의 삶이란, 최소한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무아(無我)를 주장하려면, 당연히 무아답게 삶의 모양이 소박해야 하고, 무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욕에 찌들고,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위선(僞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무아'의 가정(假定)에서 실존(實存)이니, 진아(眞我)를 논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그렇다고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엉거주춤 살라는 말은 아니다. 관리하면서 사는 삶이 아름답다. 자연무위(自然無爲)를 그저 ..

사람들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는 그것에 무지(無知)하기 때문이다. 죽음이 깊은 잠과 같다고 생각하면 두려울 리가 없다. 또 하나, 죽음이 두려운 이유는 '나'라는 소중한 것이 잊히기 때문이다. 죽는 사람들의 공통된 기대는 자기가 잊히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사람이 죽으면 의식이 사라지면서 에너지 공급이 정지하고, 몸은 부패하기 시작한다. 죽음의 두려움을 달래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부활(復活)과 윤회(輪迴)이다. 하지만 그것은 진리(眞理)가 아니다. 사람이 의식을 잃어도 에너지가 공급되면 그는 산 자이다. 몸은 죽어도 혼(魂)은 죽지 않는다고 우리는 믿는다. 그것을 우리는 귀신(鬼神)이라고 부른다. 상당한 혼령(魂靈)들은 아직 우리의 곁에 존재하지만 우리는 느끼지 못한다. 그 이유는 에너지를 잃어..

사후의 세계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마음에 담아 믿고 사는 사람도 있다. 사후를 주장하는 그 사람이 정말 죽음을 알고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이다. 죽음 뒤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를 각색하는 것이다. 열반(涅槃)을 위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어서 지옥을 피하기 위해 공덕을 쌓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꿈을 좇고 있을 뿐, 자기가 누군지 그 당체(當體)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실재(Reality)요,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끄달림들을 벗어나게 하고, 당장 극락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주체(主體)이니 말이다.

내가 시작된 자리가 어디인지, 죽으면 어찌 되는지? 이 몸은 조만간 없어질 것이고, 생각과 감정은 출처도 없이 수시로 변하는 것이고, 숨(에너지)과 의식도 서로 분리되는 순간 사라지고 말리라는 것이 과학의 설명이다. 지금 우리는 영멸(永滅)로 가는 급행열차를 타고 있다. 반면에 선도는 영원으로 가는 완행열차다. 몸과 에너지와 의식의 공부이다. 하지만 애써 닦아야 하는 성가심이 있다. 지금 이 순간, 나는 어느 쪽을 택해야 할까?

몸과 마음은 에너지(氣)에 의존하여 존재합니다. 그러므로 에너지가 부족치 않도록 늘 관심을 기울여야 합니다. 에너지가 약해지면 심신(心身) 역시 쇠잔(衰殘)해지고 말기 때문입니다. 죽음이란 에너지가 끊어진 상태입니다. 에너지가 끊기면 심신의 모든 작용이 정지합니다. 뿐만 아니라 진여(眞如)도 사라질지 모릅니다. 그 것은 Battery가 Shutdown되면 모든 전자기기 작동이 정지되는 것과 같은 이치입니다. "범죄하는 그 영혼(soul)이 죽으리라(에스겔 18:4)." 그들이 말하는 自性은 있다고도 없다고도 할 수 없는, 단지 에너지에 의존해 존재했던 연기체(我相)이기 때문입니다. 선도(仙道)에서 원기(元氣)를 일깨우고 연단(鍊鍛)하는 이유는 진여(眞如)의 영존(永存)을 도모하기 위함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