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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이것이 있으면 저것도 있고, 저것이 없은 즉 이것도 없습니다. 깨달음이란 작용(作用)과 연기(緣起)를 알아챈 것입니다. 괴로움이란 잘못된 의미 부여로 인한 부작용입니다. 무슨 일이 닥치든 그것에 별다른 의미(意味)를 부여하지 않으면 그대로 흘러가 버립니다.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 만사(萬事)의 작용처가 텅 비어있다는 것을 알면 언제나 여여(如如)할 수 있습니다. 생각을 없애려고 애쓸 필요가 없습니다. 하루 종일 온갖 생각 속에 지낸다 할지라도, 단전에 마음을 두고, 그것에 에너지를 부여하지 않으면 한 생각도 일으키지 않은 것과 같습니다. 단지 에너지를 지키며 살 뿐입니다. 언제나 빈틈이 없이 에너지가 충만한 상태, 그것을 일상삼매(一相三昧)라고 합니다.

"나라는 것은 없다"를 주장하는 초기불교 사람들의 대화를 들었습니다. 처음엔 조사선(祖師禪), 간화선(看話禪)을 비웃는 것으로 대화를 시작하더니,결국 알아채는 '그놈' 역시 연기작용(緣起作用)이니 '나는 없다'고 결론 내릴 수밖에 없다고 하였습니다.그 결론이 맞다면, 지금 그렇게 말하고 있는 '그놈'은 누구인지요? 얻어들은 '무아(無我)'라는 문자에 너무 매인 것은 아닌가요?그것 역시 말일 뿐인데 말입니다. 움직일 수 없는 눈앞의 사실을 아니라고 열심히 설명해 보려는 대표격 노인의 우왕좌왕하는 말투가너무나 옹색해 보였습니다.시타르타의 無我는 五蘊(色受想行識)의 당체가 비어(空)있다는 말입니다.그 말을 문자대로 "없다"라 해석하는 것은 空이란 말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오해가 아닐까요?알아채야..

눈은 보지 못하고, 귀는 듣지 못합니다. 신경(神經)도 보고 듣지 못하고, 뇌(腦) 역시 듣고 보지 못합니다. 듣고 보게 하는 놈은 따로 있습니다. 그것은 눈과 신경 뇌를 연결하여, 보고 듣게 만드는 작용(作用)이란 놈입니다. 그것이 느끼게 하고, 생각과 감정도 일으키고, 마음도 이리저리 운영합니다. 그것을 이름하여 진여(眞如), 본래면목(本來面目)이라고 하고 그것을 여실(如實)히 깨우친 것을 견성(見性)이라 합니다. 깨달은 사람이나 무지(無知)한 사람이나 삶이 다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깨달은 이는 그것을 알므로 주인으로 살고, 깨닫지 못한 이는 그것을 모르기에 노예처럼 삽니다. 깨달은 이는 가진 것이 적고 지위(地位)가 낮아도 걸림이 없이 자유롭지만, 무지한 사람은 많은 재산(財産)에 지위가 높아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