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자연무위 (5)
谷神不死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는 말이 있다. 철학을 한다는 모모의 서양 사람들이 무아(無我)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게 맛(?) 정도는 알고 그리 말하는지 안쓰러운 감이 든다. 無我의 삶이란, 최소한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무아(無我)를 주장하려면, 당연히 무아답게 삶의 모양이 소박해야 하고, 무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욕에 찌들고,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위선(僞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무아'의 가정(假定)에서 실존(實存)이니, 진아(眞我)를 논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그렇다고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엉거주춤 살라는 말은 아니다. 관리하면서 사는 삶이 아름답다. 자연무위(自然無爲)를 그저 ..

싯다르타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래서, 고생을 벗어나려면 그를 따라 비구(比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인생은 고생, 영원한 안정은 없다. 모든 만족은 모든 불만족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지금의 만족도 결국은 고통으로 변한다." 그것이 그가 주장한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의 주장, "고(Suffering)의 근본적 해결은 무(無)로 돌아감 밖에는 없다" 그 말에도 일리(一理)는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을 달든, 열반은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모두 태우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탈(Moksha)이지, 열반(Nibvana)이 아니다. 열반(涅槃)은 소멸(blowing out; extinguish), 즉 생명의 불이 꺼져 흔적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키기 때..

선도인(仙道人)으로 산다는 것은 매우 흥미로운 일이다. 선도인은 어느 쪽으로도 치우치지 않는다. 세속의 일 어느 것도 거부하지 않는다. 세상일이란 것이 한쪽만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리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유불선(儒佛仙)의 범주로 구별할 때, 예수교는 선도에 속한다. 특별히 주님을 상정하지는 않지만, 기(氣)를 인정한다는 점, 그리고 건강과 영생을 추구한다는 점에서 일치한다. 불교(佛敎)와는 선불합종(仙佛合宗)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로 친밀하다. 선도인의 은둔은 자연스럽다. 무리한 출가를 하는 등 유별나게 살지 않고, 허락하는 한 사회의 규범을 따르며 유인(孺人)처럼 산다. 선도의 추구는 무위자연(無爲自然)이다. 기운을 인조이(enjoy)하면서 산다. 아마도 그것은 신앙을 초월하여 누구에게나 로망일 것..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는 한, 에고는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과 마음이 있는 한, 탐냄, 성냄, 어리석음 역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에고를 버리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역사상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에고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에고는 애쓴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애쓰는 그것이 바로 에고이니 말입니다. 본성(本性)을 깨우쳤다면 그냥 두어도 에고는 저절로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저 조용히 있도록 그대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자연무위(自然無爲)라고 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에고와 다투지 않습니다. 그는 에고를 이해하고 설득하고 알아서 순복(順伏)하게 만듭니다. 에고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스스로 맡은 직..

내 말은 매우 알기 쉽고 행하기도 역시 쉬우나, 세상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고, 따라서 실천이 없습니다. 吾言甚易知甚易行, 天下莫能知 莫能行 노자 70장의 이야기입니다. 사람들은 알려고 하지 않습니다. 그들은 믿는 것에 익숙합니다. 이해하는 것은 귀찮은 일이지만 믿음은 간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래도 말입니다. 선지자(先知者)들은 한결같이 ‘사랑하라’고 명령했지만, 진실로 타인을 배려하는 사람은 드믑니다. 배려는 믿음에서 나오는게 아니고, 이해에서 나오기 때문입니다. ‘안다’는 것은 매우 중요합니다. 삶이란 끝없는 앎의 여정이기 때문입니다. 스승이 제자들에게 물었습니다. “알고 짓는 죄가 크냐? 모르고 짓는 죄가 더 크냐?” 잠시 생각을 한 제자들은 ‘알고 짓는 죄가 더 큽니다’라고 답했습니다. 즉시 스승..