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자성 (16)
谷神不死
깨달음이란, 자기 성품(性品)을 만나는 것입니다. 깨달음은 외부의 어떤 초월적 힘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무엇보다 소중한 것이 자성(自性)입니다. 초월적 힘을 받더라도, 받을 "내"가 있어야 합니다. 받을 "나"가 분명치 않으면 초월적 힘이 오더라도 어느 자리로 내려오겠습니까? 무엇보다 먼저이고 소중한 것은 진여자성(眞如自性)입니다. 무엇에도 의지하지 마십시오. 그것이야말로 '하늘 위아래에 홀로 존중받는 존재(天上天下唯我獨尊)'입니다. 나를 깨우치는 순간, 선계(仙界)로 이동하여 불멸(不滅)을 얻게 됩니다.
송담(松潭) 선사(禪師)는 최근 공개된 불교방송의 2020년 5월2일 법문(法文)에서 '夕陽西去水東流 暑往寒來春復秋'라는 게송(偈頌)을 읊었다. https://youtu.be/Wxz74w2FwhQ 석양이 서쪽으로 가든, 물이 동쪽으로 흐르든,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더위가 지나가고, 추위가 오든, 봄이 다시 가을이 되든 말든, 그것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우리는 과연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는가? 우리는 무엇을 깨달아야 하는가? 소크라테스가 언급했듯, '나'를 빼고 무엇에 관심을 가져야 하며, 무엇을 깨달아야 한단 말인가? 내가 없다면, 석양(夕陽)도, 물도, 동쪽도, 서쪽도, 없을 것이며, 더위도, 추위도, 봄, 가을이 나에게 무슨 의미가 있단 말인가? 그의 게송이 가리키는 곳은..
외롭고, 우울하고, 그리고 두려움이 엄습하는 이유는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자기를 알아채기 시작하는 순간부터 외로움, 우울함, 두려움은 서서히 사라집니다. 그것들은 어두움이고, 자성(自性)은 밝음이기 때문입니다. 선도(仙道)는 단전(丹田)을 통해 자성을 만납니다. 단전은 자성으로 통하는 Gate이기 때문입니다. 먼저 오랫동안 잠자던 단전을 깨워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의 본래면목(本來面目) 자성과 쉽게 만날 수 있습니다. 선도의 외단공은 남성이요, 내단의 중심인 단전은 여성입니다. 남성이 여성을 찾듯, 여성도 남성이 필요합니다. 그것이 에너지의 문을 열어주기 때문입니다. Sex를 통한 오르가즘은 에너지의 문이 열림을 일시적으로 느끼는 것입니다. 단전이 열려야 진정한 오르가즘을 알 수 있습니다...
마음은 믿을 것이 못 됩니다. 조석(朝夕)으로 변하는 것이 마음이기 때문입니다. 어제까지는 그것이 없으면 못 살 것 같다가도, 변하면 그것 때문에 못 살겠다 하는 것이 마음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그 마음은 마음이 아닙니다. 그 마음 말고 진짜 마음이 있습니다. 그것을 본심(本心), 혹은 자성(自性)이라 합니다. '마음이 부처다(卽心是佛)'라는 말이 있습니다. 본마음을 찾아 챙겨야 합니다. 그것이 깨달음입니다.
깨달음은 없다고 주장하던 사람이, "그것만은 태초부터 존재했다"고 했다죠? 물론 자성(自性)을 두고 하는 이야기겠지요. 태초가 있었다면 조물주가 있단 이야기일 텐데, 그때부터 '그것'이 존재한 건 어떻게 안대요? 누구처럼 그냥 모른다고 했다면 좋았을 텐데 말입니다. 수행은 없이 이야기만 듣고 깨닫는다는데, 그런 사람에겐 이야기 듣기가 수행이겠지요. 그런 깨달음이 과연 오래갈까요? 조신하게 공부하는 사람 엄청 헷갈리겠네요. 게다가 우리는 두 과목이나 공부해야 하는데...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고, 내가 사용하는 도구다? 그렇다면 '나'라는 느낌, '나'라는 생각은 어떠한가? 그것 역시 태어나서 지금까지 어디를 가든 변한 적이 없다. 그것이 '나'란 말인가? 기억이 가미된 생각이라면, 그것은 내가 아니다. 그것은 뇌가 만든 조작물(造作物)이다. 지금 보고, 듣고, 느끼는 생생한 이것, 순간순간 알아채고 있는 이것, 바로 이것이 여래(如來) 자성(自性)이다. 자성(自性)은 한끝의 빈틈도 있어선 안 된다. 부정할래야 도무지 부정할 수 없다면, 이젠 그만 의심을 그쳐야 한다.
자기가 자기를 누군지 모르고 산다면 그것을 살아있다고 할 수는 없다. 그래서 일체(一切)가 허망(虛妄)하다느니, 꿈 같고 허깨비 같고, 물거품 같고, 그림자 같다고(如夢幻泡影) 하는 것이다. 아직도 극소수의 사람들만이 깨달음 길에 나서며, 대부분은 벌어지는 일에 속아 이리저리 휘둘리면서 살고 있다. 그들은 자성(自性)에 대해선 관심조차 없다. 그들은 소유와 권력, 그리고 Sex만이 인생의 모든 것이라 알고 있다. 조금만 생각을 조율해 본다면 외로움, 우울함, 두려움에서 벗어날 수 있는데 말이다. 모든 괴로움(苦)은 자기 정체성의 부재로부터 온다. 하루 10분 만이라도 외부로 향하는 마음을 내부로 돌려보자. 보고 들리는 것들과 느낌만을 따라가기보다 그리하는 본체(本體)에 에너지를 써보자. 숨을 고요히 지켜..
자성(自性)은 무궁무진한 기능을 가지고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단지 "알아차림"뿐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오산입니다. 우리가 모를 뿐, 그것에겐 우리에게 필요한 것, 모두를 이루게 해주는 힘이 있습니다. 깨우쳐야 합니다. 수표를 단지 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에게 그것은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습(無用)니다. 하지만 수표의 기능을 알고 있는 사람은 그것으로 무엇이든 필요한 물건을 구해 옵니다. 깨달음은 대단한 일입니다. 하느님(自性)을 알아챈 것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겐 형체는 분명치 않아도, 없다고 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마음이라 하며, 천변만화를 일으키는 바로 그놈입니다. 그놈 속에는 이미 우리에게 필요한 모든 것들이 이미 갖추어져 있어서, 비우면 비울수록 그것의 기능이 형상됩니다. 비울 것은 생각들과 그것이 굳어진 믿음이란 놈입니다. 그것들이 쓸어내지면, 그 자리엔 자성(自性)만 남습니다. 그 쓰레기들(생각들과 믿음)은 분명 일시적으로는 유용했었지만, 그것들은 마치 점령군과 같습니다. 우리를 부자유하게 하고, 우리의 삶을 지배하려 들기 때문입니다. 그것이 마음 비우기가 필요한 이유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거의 불가능합니다. 모두들 마음으로 마음을 비우려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검사(檢事)의 범법을 한통속의 檢事들로 밝히려 하는 것과 같습니다. ..
사람들이 괴로움 속에 사는 이유는 자기가 누군지 모르기 때문이다. 삶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일은 자기가 누군지를 아는 것이다. 그것을 모른다면 인생 전체가 허망(虛妄)해질 것이다. 사람들이 자기 정체성에 관심이 없는 이유는 그것을 몰라도 사는 데는 지장이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기가 누군지 모르고 사는 삶은 살았다고 할 수 없다. 그것은 나무나 바위, 개나 돼지와 다를 것이 없는 삶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흘러 지나간다. 오직 자성(自性)만이 거기에 여여(如如)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