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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견성(見性)을 원하는 사람에게 선정(禪定)은 꼭 필요하다. 선정은 곧 견성으로 통하기 때문이다. 간화선(看話禪)에 있어 의단(疑團)이 필요한 이유 역시 禪定과 연관되어 있다. 혜능(慧能)의 "見性만 말할 뿐 禪定 해탈(解脫)은 말하지 않았다"는 말은 잘 이해해야 한다. 그가 이어서 말한 불이법(不二法)에 유의해야 한다. 그 말은 선정은 견성이요, 견성은 곧 解脫이란 의미이다. 不二는 생사(生死), 선악(善惡), 인과(因果)가 둘이 아님이다. 見性 이후는 더 이상 애씀(禪定)은 필요치 않다. 깨어있음이 곧 선정이기 때문이다. 불이법을 이해하면 바로 일승(一乘)이다. 성문(聲聞) 연각(緣覺)이 곧 보살(菩薩)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물속에서 물을 찾는 것'이라 하고, '세수하다 코 만지는 것보다 쉽다'고도 합니다. 너무 쉽기 때문에 생겨난 말입니다. 단지 돌아서기만(Realize) 하면 되니 말입니다. 약간만 관심만 기울인다면 누구라도 깨우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에너지가 약하면 세파(世波)에 휘둘리면서 살 수밖에 없습니다. 마음의 작용을 이해한다 해도 에너지를 모르면 어두움으로 다시 되돌아가기 쉽습니다. 여태 나를 이끌며 살아 온 습(習)을 이겨내기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깨달음 이후 에너지 공부가 필요합니다. 우주는 에너지로 가득합니다. 선도仙道는 그것(氣)과 함께 사는 법을 가르칩니다.
석가의 첫 출가(出家) 동기는 견성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질병과 죽음을 본 후, 그것으로부터 벗어나려는 목적으로 지위를 버리고 집을 나섰습니다. 그 후 수많은 공부 여정(旅程)과 스승들을 통해 Samadhi(定)야말로 평화를 주는 길이라고 믿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요새 말로 명상(冥想)입니다. 그러나 최고봉(滅盡定)까지 힘들게 올랐지만, 일시적 평화를 줄 뿐, 지속적 안정(安定)을 가져오지는 못했습니다. 다시 그는 히말라야에 올라 수년간의 고행(苦行)으로 몸을 혹사했지만, '혹시나'는 '역시나' 였습니다. 결국 그는 모든 것을 내려놓고, 보리수나무 아래 앉아 샛별을 보고 깨쳤다고 역사는 전합니다. 혹자는 그동안 쌓은 수많은 공덕이 보리수나무 아래서 단번에 꽃 피웠을 것이라고 설명합니다. 그 말도 물론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