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알음알이 (5)
谷神不死
깨달음은 알음알이가 아니다. 말로만 깨달았을 것 같으면, 세상 사람 모두에게 이밥에 고깃국을 매일 먹일 수 있을 것이다. 깨달음은 수학 문제나 수수께기 풀이가 아니다. 고로 문답만의 검증으로는 부족하다. 깨달았다면 몸과 마음, 그리고 말(身口意)로 비롯되는 삼업(三業)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 고로 늘 자기관조(自己觀照)와 자아비판에 게을러서는 안 된다. 중도(中道)의 삶이 기본이며, 번뇌와 욕망이 일어나면 단칼에 정리할 수 있어야 한다. 죽는 순간까지 홀로서야 한다. 특히 자기 문제(특히 건강)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 깨달았다 할만하다.
자기를 속일 수는 없습니다. 경전(經典)을 끌어다 붙이고, 선지식(善知識)들 노래나 따라 부른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늑대가 어쩌다 호랑이 탈을 쓰고 있다 하여, 호랑이는 아닙니다. 토끼, 멧돼지가 나를 보고 도망간다 하여, 내가 호랑이는 아닙니다. 호랑이들이 나를 호랑이라 해줘야 비로소 호랑이인 것입니다. 혼자서 맥없이 깨달음을 과시한다고 깨달은 것은 아닙니다. 어느 쪽으로 살펴봐도 한점의 의심도 없어야 깨달은 것입니다. "내가 깨닫지 못했다면 세상에 누구도, 심지어 석가모니도 깨닫지 못했다"라고 당당히 이야기할 수 있어야 비로소 '깨달았다' 할 수 있습니다. 견성(見性)은 성(性)을 본 것(見)입니다. 性이 어제 다르고 오늘 다를 수 있겠습니까? 한국 다르고, 미국 다를 수 있겠습니까? 성품(性品..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을 깨달음이라 하며, 내가 누군지를 알려면 내가 아닌 것들을 모두 내려놓으면 됩니다. 우선 눈에 보여지고 귀에 들리는 것, 눈과 귀, 보고 듣는 기능은 내가 아닙니다. 내 몸과 내 마음은 내가 사용하는 도구이기 때문입니다. 나는 생각도 아니고 느낌도 아닙니다. 무엇인가라도 있으려면 내가 있어야 하며, 없으려 해도 '내가' 없다고 해야 합니다. 나는 언제부터 생겼는지 모릅니다. 하지만 언제나 나(?)와 함께 있습니다. 나를 찾는답시고 별다른 짓을 하지 마십시오. 이해는 하지만, 여행도 떠나지 말고, 템플스테이도 하지 마십시오. 나는 한 번도 나(?)를 떠나 있은 적이 없습니다. 내가 있어야 세상도 있으며, 내가 없으면 세상도 없습니다. 자존심도, 자존감도 나는 아닙니다. 그것 역시 '..
견성(見性)이란 움직이지 않는 그 자리, 세상에 두루한 그 자리를 알아채는 것입니다. 그 자리를 알려면 마음(생각)을 쉬게 하고, 마치 렌즈로 먹지를 태우듯이 초점을 잡고 기다리면 됩니다. 간단합니다. 깨우친 사람들은 이구동성으로 말합니다.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쉽다고 말입니다. 알음알이를 내려놓고 마음을 고요하게 하고, 느긋하게 기다리면 됩니다. 그러면 깨닫습니다.
태식(胎息)을 모르고 견성을 말하는 것은 연료 없는 배로 태평양을 건너자는 것과 같다. 그리고 태식을 이야기하려면 먼저 숨을 알아야 한다. 숨은 호흡(呼吸)이 아니다. 숨은 호흡의 원동(原動)이며 깨달음의 핵, 진종자(眞鍾子)라는 것부터 이해해야 한다. 태식을 깨달음의 완성이라 하는 것은 태식을 이해하면 생사를 뛰어넘어 존재의 주인이 되기 때문이다. 당신은 그것을 위해 어떤 방편을 이용해도 좋다. 혹시 방편을 쓰지 않고 드러나게 하면 더욱 좋지만... 숨은 生命(氣)이다. 그것은 살아 있음의 증거이며, 모든 존재 활동의 동력이다. 우리는 노력 없이 그것을 그냥 얻었지만, 세상에 그것보다 더 소중한 것은 없다. 숨을 알려면 잠시 잡다한 세상사를 뒤로 미뤄놔야 한다. 그것은 생각으로는 알아낼 수 없는 것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