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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사람은 마음속에 각인된 대로 따라 사는 습성이 있다.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마음속에 무엇을 심을 것인가이다.각인의 방법은 "반복적 입력(入力)"이다.사람의 마음은 반복되는 것을 진실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마음속에 무엇을 심을 것인가는 전적으로 당신의 선택이다.평화와 안정을 심을 수 있으며, 공격성과 불안을 자리 잡게 할 수 있다."나는 있다"고 믿을 수 있으며, "無我(나는 없다)"를 신앙할 수도 있다."신선(神仙)"의 삶을 심을 수 있으며, "일체개고(一切皆苦)"를 믿을 수도 있다."미래의 행복"을 믿을 수 있으며, "결국은 불행해지고 말 것이다"를 믿을 수도 있다.믿음에 의해 말과 행동은 달라진다. 그 모든 것은 당신의 자유다.
깨달음을 가르치는 선생(스님)에게 물었다. "깨달으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그는 "질문이 틀렸다"라는 심오(深奧)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지성(知性)을 가진 자는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간다. 본능(本能)에만 의지하는 짐승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싯다르타가 출가(出家)한 동기는 혼돈과 고통의 해결이었고, 그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전해진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 위해 돈과 시간을 바친다. 어떤 이는 인생 전체를 깨달음에 밀어 넣는다. 그곳에 있을 때, 그들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와 세상과 며칠 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내가 만난 사람 중 진정으로 여여(如如)하게 지내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왜 그런가? 깨달음(?)만으론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에너지가 받쳐주지 못해..
싯다르타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래서, 고생을 벗어나려면 그를 따라 비구(比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인생은 고생, 영원한 안정은 없다. 모든 만족은 모든 불만족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지금의 만족도 결국은 고통으로 변한다." 그것이 그가 주장한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의 주장, "고(Suffering)의 근본적 해결은 무(無)로 돌아감 밖에는 없다" 그 말에도 일리(一理)는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을 달든, 열반은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모두 태우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탈(Moksha)이지, 열반(Nibvana)이 아니다. 열반(涅槃)은 소멸(blowing out; extinguish), 즉 생명의 불이 꺼져 흔적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키기 때..
값싸게 얻은 것에 가치를 두는 사람은 없습니다. 애써서 얻은 것을 더 소중히 여기는 것이 인지상정입니다. 몇 년의 각고 끝에 깨우친 수행자와, 몇 개월 만에 쉽게 초견(初見)을 얻은 사람의 깨달음이 같을까요? 물론 깨달음은 동일한 것일지라도 당사자가 느끼는 가치는 다소 다를 수 있습니다. 많은 희생을 치르고 깨달은 이는 그 깨달음을 더없이 소중히 생각합니다. 밝음의 기회를 준 스승을 아비처럼 공경할 것이고, 깨우침이 더 깊어지도록 늘 애쓰게 됩니다. 쉽게 깨닫는 것처럼 큰 복은 없지만, 소중함을 잊으면 차라리 깨닫지 못하느니만 못할 수 있습니다. 관리를 소홀히 하면 깨달음에 녹이 슬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의 소중함을 안다면 그 가치만큼 어디에든 회향(回向)하는 것이 좋습니다. 초보자 가르치는 일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