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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누구나 떵떵거리며 살고 싶어 한다.하지만 떵떵거린다는 것은 전적으로 남의 눈을 의식해서다.대부분의 사람은 돈과 권력을 위해 살며, 자기 자신에게는 소홀히 한다.떵떵거릴 자리는 자기 자신이어야 한다.백만 권의 책을 읽는 것보다 몸과 마음이 무엇에 의해 작용하는지를 알아야 진정으로 떵떵거릴 수 있다.사람은 정기신(精氣神), 즉 몸과 마음, 그리고 에너지로 구성되어 있다.하지만 몸과 마음을 작용시키는 에너지(氣)를 모르고 산다면 그 어떤 것으로도 떵떵거릴 수 없다.끝까지 남는 것은 나 자신 뿐이지만, 그것을 유지하는 것은 에너지이기 때문이다.

모든 일은 조건에 의해 일어나고, 꺼진다. 조건이 있으면 있고(살고), 조건이 없으면 없다(죽는다). '연기(緣起)'를 말한 것이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기운이 잘 통하고 실(實)하면 건강하고, 기운이 불통(不通)하고 부실(不實)하면 병들고 죽는다. 우리의 생명을 유지하는 것은 에너지(氣)이며, 인간 생명은 에너지와 의식의 콜라보(collaboration)에 의해 유지된다. 우리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살기 위해 살아선 정기신(精氣神)의 조화요, 죽어선 에너지(氣)와 의식(神)을 어찌 계합(契合)하고 운영하느냐이다. 세상 모든 것은 조건에 의해 유지되고, 쇠퇴한다.

싯다르타는 완벽주의자였다. 그래서, 고생을 벗어나려면 그를 따라 비구(比丘)가 되어야 한다고 했다. "인생은 고생, 영원한 안정은 없다. 모든 만족은 모든 불만족을 필연적으로 동반하며, 지금의 만족도 결국은 고통으로 변한다." 그것이 그가 주장한 일체개고(一切皆苦)에 대한 설명이었다. 그의 주장, "고(Suffering)의 근본적 해결은 무(無)로 돌아감 밖에는 없다" 그 말에도 일리(一理)는 있다. 하지만 어떻게 해석을 달든, 열반은 빈대 한 마리 잡자고 초가삼간을 모두 태우자는 말과 다르지 않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해탈(Moksha)이지, 열반(Nibvana)이 아니다. 열반(涅槃)은 소멸(blowing out; extinguish), 즉 생명의 불이 꺼져 흔적 없는 상태가 되는 것을 가리키기 때..

세간(世間)을 떠나서 도(道)를 논(論)한다면 반쪽짜리 견성(見性)입니다. 체험이 없는 미사여구(美辭麗句)는 사상누각(砂上樓閣)입니다. 이 몸과 숨을 무시하는 견성 역시 반쪽짜리 깨달음입니다. 에너지를 모르고 깨어있음을 말할 수 없습니다. 그 모든 것이 그 자리 생명(生命)으로부터 나오기 때문입니다. 에고는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이 몸과 마음을 지니고 있는 한,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내가 담배를 피워야 하고, 술을 마셔야 합니다. 담배가 나를 피우고, 술이 나를 마시게 해서는 안 됩니다. 말과 문자, 그리고 논리(論理)가 나를 굴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경전(經典)이라 할지라도 내가 굴릴 수 있어야 바른 경전입니다. 눈이 열려야 합니다. 혜안(慧眼)이 열리지 않고는 그 무엇도 불가능한 ..

우리는 기(氣)가 가득한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므로 느끼려고만 한다면 누구라도 氣를 느낄 수 있다. 생명 자체가 氣이기 때문이다. 나름 氣 전문가로 알려져 있어서 가끔 氣의 강도를 감별해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대개는 자기 상품에서 氣가 많이 나온다는 증언(證言)해달라는 요구다. 나는 보통 "많은 氣를 머금고 있군요. 하지만 식물이든, 광물이든, 氣를 머금지 않은 것은 없습니다"라고 말한다. 사실이 그러하기 때문이다. LA에 머물고 있을 때 초청을 받아 애리조나의 세도나를 방문한 적이 있다. 氣가 특별히 강하다고 소문난 곳이다. 하루를 있어 본 결과 다른 곳에 비해서 색다른 기감(氣感)을 느낄 수는 있었지만 특별하게 좋다는 점은 발견키 어려웠다. 초청자들은 물론 실망했겠지만.... 氣感이 강하기로 말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