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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기독교를 혐오하게 되었는데, 그 이유 중 큰 것은 그들의 공격성 때문이다.정치가는 위기를 극복하는 방법으로 타도 대상을 만든다. 기독교의 공격성은 그들 스스로 위기 속에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예수 자체가 이율배반적이다. 한 입으로는 사랑을 말하지만, 다른 입으로는 전쟁을 부추긴다."내가 세상에 화평을 주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화평이 아니요, 검을 주러 왔노라. 내가 온 것은 사람이 그 아버지와, 딸이 어머니와, 며느리가 시어머니와 불화하게 하려 함이니. 사람의 원수가 자기 집안 식구리라.” (마10:34-36)기독교는 박해로 시작했다. 그러다 어부지리로 운 좋게도 막강한 힘을 얻게 되었다. 권모술수의 정치적 힘에 의해서 말이다.기독교는 늘 불안하다.언제 그들로부터 다시 버림받..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누구나 상대에 맞춰 자신을 바꾸려 한다. 그리고 남들 앞에서 그 사람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 선도(仙道)를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바꿀 의사가 없다면 그의 공부는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남들에게 仙道를 자랑하지 못한다면 그의 공부는 힘이 잃어 지지부진하다 끝나고 말 것이다. 선도를 한다고 하면서 과거를 청산치 못하고 질질 끌리며 사는 사람은 진정한 선도인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 일체의 삶은 고(苦)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에겐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 싶지 않다.
인간관계의 핵심은 서로에 대한 존중이다. 이혼의 이유에 대해 보통은 '성격 차이'라거나, 더 솔직 '성적(性的) 차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나와 다른 성격의 상대라도 상대가 나를 존중하고 있다고 느끼고 있다면 헤어지기 어렵다. 나아가 Sexless라 할지라도 말이다. 상대가 나를 무시한다는 생각이 든다면 누구라도 그 사람과 절교를 생각하게 마련이다. 세상에서 가장 존중받아야 할 사람은 누구인가? 말할 필요도 없이 그것은 나 자신이다. 남, 특히 자기 사람을 존중하지 않는 사람은 남을 존중하기 어렵다. 자기를 존중하는 사람만이 상대를 존중할 수 있는 것이다. 왜 깨달아야 하는가? 그것 역시 존중받기 위함이다.
타인에게 관심을 나타내고, 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너와 내가 둘이 아니란 것, 너도 없고 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아서가 아니다. 그렇게 하면 뿌듯한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행복해지기 때문이다. 너와 나는 둘이 아니라고 말하지 말라. 그리되면 정말 곤란한 일이 생긴다. 이 사회가 무너질 것이다. '너도 없고, 나도 없다'고 말하지 말라. 그리 말하고 하룬들 살 수 있겠는가? 이론(理論)과 교리(敎理)는 그것대로 책 속에, 머릿속에 그대로 두라. 그랬을 때 아름답다.
예수 그는 구세주(Messiah)임이 틀림없다. 그는 인류가 상상할 수 없는 위대한 일을 하고 떠났다. 하나는 원죄(原罪)를 없앤 것이고, 다른 하나는 우리가 누군지 알려주었다. 사실상 그는 罪라는 것이 원래 없다는 것을 익히 알고 있었다. 과일 하나 따 먹은 게 죽을죄란 말인가? 죄란, 마음을 따라서 일어나는 허깨비에 불과하다. (罪無自性從心起) 그는 죄 없이 순순하게 목숨을 내놓았다. 그것은 우매한 사람들을 향한 더없는 사랑이었다. 그는 우리의 정체성, 본래면목을 아주 간단히 알려주었다. "너희는 이렇게 기도하라.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마태 6:9) 당신의 있지도 않은 죄는 이미 2000년 전에 사라져 버렸고, 아버지가 바로 하느님인데 무엇이 두려울 것인가?
당신은 어떤 종류의 믿음이 있는가? 국어사전에서는 믿음에 대한 정의를 아래와 같이 두 가지로 하고 있다. 1. 사실이나 사람을 믿는 마음 2. 대상(종교)에 대한 신자로서의 태도 두려워하고 경건히 여기는 마음 사실이란 실제로 있었던 일이나 현재에 있는 일이므로, 믿고 말고 할 필요가 없다. 믿음이란 첫째로는 인간관계에서 일어나는 사람 사는 데 필요한 일이며, 두 번째는 신앙조직에서 상정한 절대자를 대상으로 사용한다. 하지만 신앙단체의 유지에 필수적인 것으로, 믿음이 없으면 조직은 무너진다. 보통 신앙과 종교를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그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무식의 소치이거나 자기 신앙에 대한 과포장이다. 믿음처럼 모호하고 안정적이지 못한 것은 없다. 그것을 위해 목숨도 바치지만, 그것처럼 배신이 흔한 것도..
하느님을 만나기 위해선 진정한 안식이 꼭 필요합니다. 몸과 마음을 이완(Relax)하고 푹 쉬어야 합니다. 일만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모든 걸 내려놓아야 합니다. 이것저것 머릿속이 복잡해선 결코 하느님을 만날 수 없습니다. 예수는 안식일에 일(병 고침)을 했습니다. 일반론으로 보면 그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은 듯합니다. 하지만... 그에게는 매일이 안식일이었습니다. 요단강 침례 이후 안식을 통해 하느님의 아들임을 늘 확인하고 살았습니다. 안식은 편히 쉬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느님과 함께 있기 위해 꼭 필요한 일입니다. 예수님은 안식일이 아닌 날도 늘 안식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그에겐 따로 안식일이 필요 없었습니다. 그래서 그의 이름이 임마누엘(하느님이 우리와 함께 계신다)인 것입니다. 그런 이유로 ..
사창가를 찾은 학생이 거기서 교수를 만났다. "아니, 교수님도 이런 데 오세요?" "얌마... 교수는 거시기도 안 달렸냐? 학생이 교수에게 다시 물었다. "옛날엔 가족을 위한 희생으로 피치 못해 몸을 팔았다던데, 요새는 명품을 사려고 자청해서 몸을 팔고, 또 그것을 즐기는 여자도 꽤 있는 거 같아요" 늙은 교수가 말했다. "말을 안 해서 그렇지, 옛날에도 그랬어." 매춘(賣春)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가장 오래된 직업 중 하나다. 하지만 Korea에서 매춘은 현행법상 위법이다. 성 노동자는 학대의 피해자고, 손님은 사이코패스 강간범인가? 정숙한 부인을 둔 그럴듯한 남성이 왜 유곽을 찾는지 혹시 알고 있는가? 매춘은 불결한 일인가? 자위행위조차 Bible은 죄라 규정하는데? 일본은 패전 후, 미군들에게 자국 ..
적어도 50살 이상 살았다면 그동안 적어도 몇천 명의 사람은 만났을 것이다. 재밌게 놀아주던 동네 친구들, 초등, 중등, 대학의 친구들에서 시작해, 나를 좋아했던 사람, 내 가슴을 절절하게 했던 사람, 내가 필요해 만난 사람들, 나를 필요로 해서 만난 사람들, 사람들... 그들은 지금 모두 어디에 있는가? 그 중엔 이 사람이라면 평생 친구로, 동료로, 동반자로 하고 싶은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들은 지금 어디 있는가? 폰 속에 전화번호라도 남아 있는가? 아마도 패티의 노래 속, "어쩌다 생각이 나겠지요"처럼 되었을 것이다. 여간한 로맨티스트가 아니라면 아직도 "그렇게 사랑했던 기억을 잊을 수는 없을 거야"라고 읊조리지는 않을 것이다. 필요가 다해 사라진 사람들, 사소한 오해로 절교한 사람들, 사람들....
태초부터 아버지 하느님이 있었다. 그러나 하느님의 능력은 매우 조촐한 것이어서, 그 아들에게 진리를 온전히 전달할 수 있는 방법은 존재하지 않았다. 오직 마음이 가난한 자들만이 어렴풋 그 뜻을 이해할 수 있었으나, 그들 역시 그 가난한 마음 때문에 방해를 받기 일쑤였다. 하느님은 아들에게 가장 온전한 사랑을 베풀었으나, 자식은 그에 교감하지 못하였고, 늘 엉뚱한 사랑을 갈구하였다. 아들은 자신이 아버지에게 사랑받아 본 적이 없다며 아버지를 원망하였다. 아들은 늘 무엇인가가 부족했고, 그것을 하느님의 탓으로 돌렸다. 아들은 아버지가 항상 자신에게 무엇인가를 줄 듯 말 듯 하다고 느꼈다. 아버지 하느님의 능력은 조촐하여서 그의 힘만으로는 아들이 진리를 깨닫도록 할 수 없었다. 아들은 어리석었으나, 놀랍게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