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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眞理는 손대지 않아도 진리입니다. 진리는 믿음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믿든, 믿지 않든, 그대로인 것이 진리입니다. 그것을 바로 아는 것이 깨달음입니다. '지금 이대로'가 바로 진리입니다. 예수는 "진리가 나희를 자유케 한다(요한 8:32)"고 했습니다. 眞理는 어느 누구의 소유도 아니며, 특정한 장소에 가야 만나는 것도 아닙니다. 진리는 지금 여기 오롯이 살아 있는 이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는 "나는 진리다(요한 14:6)"라고 한 것입니다. 바로 그가 진리이고, 바로 당신이 진리입니다. 眞理는 성직자의 말 속이나 책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바로 당신 속에... 아니, 바로 당신이 진리입니다.
인간의 본성에는 착한 면도 있지만, 자기중심적인 사악함도 무시해선 안 된다. 먼저 자기를 지켜야 한다. 인간은 배신의 존재라는 것을 잊지 말라. 누구도 믿지 말라. 누군가 지금 당신에게 공손한 것은 당신에게서 가져갈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내가 힘을 잃으면, 주위 사람들은 모두 떠나버릴 것이다. 누구라도 얻을 것이 다 하면 떠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라. 사람들의 좋은 면만 보지 말고, 늘 Case by Case라고 생각해라. 인간은 결국 자기의 이익을 위해 행동한다. 인간은 서로의 필요에 의해 관계를 맺는다. 그것은 부부간이나 부모와 자식 간에도 마찬가지다. 그것은 스승과 제자 사이에서도 마찬가지다. 스승을 잘 택해라. 주어도 주어도 더 줄 것이 넉넉한 스승만 제자에게 아낌없이 에너지(氣)를 부어줄 수 ..
자아 발견은 자기 자신의 상태와 존재 이유를 아는 것이라 말할 수 있다. 즉, 자신의 이상이 무엇인지를 알면서 자기 자신이 지금 어떤 환경과 조건에 처해 있으며, 앞으로 어떤 가능성을 가지고 주위의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형성해 나갈지를 알고 있는 상태를 말한다. 자아실현이란 자기를 완성해 나가는 것이다. 이 자아실현은 시대마다 다양한 의미를 가져왔고, 각기 사상마다 다양하게 자아실현의 과정들을 제시해 왔다. 현대 사회에서 자아실현의 의미는 인간이 완성된 존재가 아니라, 늘 변화하며 자아를 형성해 나가는 존재라고 본다. 이러한 과정에서 인간은 창조적이며, 자신의 미래를 계획하고 만들어 나가는 능동적 존재로 인식한다. -위의 글은 통합논술 개념어 사전(2007.12.15. 한림학사)을 정리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을 보는 눈이 있습니다. 그것이 열려야 합니다. 그것을 가리켜 개안(開眼)이라고 합니다. 그것이 최고의 지성(知性)입니다. 그리되면 세상사에 끄달리지 않고 살게 됩니다. 고요함에 머무르는 공부를 아무리 오래 해도 소용없습니다. 허깨비를 허깨비로 아는 눈이 없으면, 멀쩡히 눈 뜨고 계속해서 코를 베이게 됩니다. 맨날 같은 단어나 되뇌이면서 벽을 보고 앉아 있거나, 숨만 바라보는 것으로는 눈이 열리지 않습니다. 결정적 뒤집기가 필요합니다. 시끄러움 속, 혼란 속에 부대끼고 살면서, 다각적으로 닦아야 제대로 보는 눈이 열립니다. 그 눈을 제3의 눈, 혜안(慧眼), 도안(道眼), 신안(神眼)이라 합니다. 눈이 열려야, 소경이 소경을 인도하지 않게 됩니다.
깨달음이 올 때 대부분의 사람은 몸이 가벼워짐을 느낀다. 막혔던 氣가 열리기 때문이다. 강한 기감(氣感)을 느끼기도 하고, 氣가 전신으로 흐르는 것을 느끼는 사람도 적지 않다. 깨우침이 몸속 기운을 깨어나게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치(理致)로 알음알이만을 키운 사람에게는 그런 일이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그의 깨우침은 머리에서 그쳤기 때문이다. 초견(初見)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어두워지는 이유는 에너지와 연결을 못 했기 때문이다. 깨우침과 氣(小周天)를 동시에 얻은 사람은 그다음부터의 공부가 점점 더 재밌고, 풍요로워진다. 그런 사람은 나머지(補任) 공부를 수월하게 하게 된다. 氣의 작용이 그 자리가 흐려지는 것을 용납하지 않기 때문이다. 선도(仙道)에서 "본성(本性)과 에너지를 동시에 닦으라..
깨달음을 얻었다는 사람들(서양철학자 포함)은 대부분 인생을 고통으로 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고(苦)와 낙(樂)이 하나라는 것을 모른다. 그들에게 낙은 거의 사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살아있다는 것만으로도 인생은 낙(樂)이다. 우리가 더 오래 살려고 하는 것이 그 증거다. 그들이 그리도 인생을 비관적(悲觀的)으로 보는 이유는 아직 실제적 본성(本性)을 체험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 자리와 함께하는 순간, 苦도 樂도 없다. 그것들은 일어나는 당신의 생각이 그리 규정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苦가 일어나는 이유는 기운(氣運)의 흐름과 관계가 깊다. 기운의 운행만 원활하면 늙었어도 하루하루가 여유롭다. 작은 꽃 한 송이, 지저귀는 새소리, 그리고 흐르는 시냇물도 그를 즐겁게 한다.
모든 견성공부(見性工夫)는 대상(對象)에 대한 몰입(沒入)으로 시작한다. 기도(祈禱), 지관(止觀), 간화선(看話禪), 관상(觀想), 염불선(念佛禪), 단전호흡(丹田呼吸) 등등 모든 수행(修行)의 귀결(歸結)은 사마디(Samadhi), 즉 삼매(三昧)이다. 선도(仙道)는 의식(意識)으로 氣(에너지)를 지키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여 의수단전(意守丹田)으로 삼매(三昧)에 이르고 그것을 통해 견성(見性)한다. *의수단전이 중심(中心)이 되어야 하는 이유: 氣는 육체(肉體)와 정신(精神)의 양쪽에 걸쳐 생명력(生命力)의 원천(源泉)이며, 상대계(相對界)와 절대계(絶對界)를 수렴(收斂)한다. 氣는 본성(本性)에 가장 가깝다. 즉, 수련(修鍊)의 과정(過程) 중 모두가 유실(流失)되어도, 가장 마지막까지 남는..
이 몸과 마음이 살아 있는 한, 에고는 버릴 수도, 죽일 수도 없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과 마음이 있는 한, 탐냄, 성냄, 어리석음 역시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에고를 버리라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그렇게만 된다면 더 이상 바랄 나위가 없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역사상 살아있는 어느 누구도 에고를 버리지 못했습니다. 에고는 애쓴다고 사라지지 않습니다. 애쓰는 그것이 바로 에고이니 말입니다. 본성(本性)을 깨우쳤다면 그냥 두어도 에고는 저절로 힘을 잃어버립니다. 그저 조용히 있도록 그대로 두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을 자연무위(自然無爲)라고 합니다. 깨달은 사람은 에고와 다투지 않습니다. 그는 에고를 이해하고 설득하고 알아서 순복(順伏)하게 만듭니다. 에고가 하는 일에 간섭하지 말고, 스스로 맡은 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