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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유(有)에만 치우쳐 있는 사람을 속인(俗人)이라 하고, 무(無)도 숭상하는 사람을 가리켜 도인(道人)이라 한다. 선인(仙人)은 속인도, 도인도 아니며, 속인이면서 도인이다. 유와 무를 둘 다 안고 가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無를 바로 깨우치는 공부가 견성(見性)이며, 有도 동시에 수용하는 공부가 득명(得命)이다. 무(空)를 깨우치기는 쉽다. 아무런 노력이 필요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유(命)를 닦기는 쉽지 않다. 그것을 위해선 시간과 땀이 투자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허망(虛妄)한 세상을 떠나 산속으로 숨어 들어가기는 쉽다. 진짜 어려운 것은 이 세상과 웃고 웃으며, 세상 속에서 세상 사람들을 안고 사는 것이다. 선도(仙道)는 有와 無를 동시에 포용한다. 비유하자면 어머니와 아내 두 사람을 다투지 않게 ..

사람에겐 존재감이 그 무엇보다 중요하다. 아이가 투정 부리며 우는 것도, 성적 다툼, 주먹 다툼, 자리다툼, 그리고 얼굴과 몸매를 고치는 것도 모두 존재감 때문이다. 정권(政權)을 잡으면 전 정권의 실적이나 추진하던 일들을 모두 무효화한다. 그때 국익(國益)은 고려 대상이 아니다. 역시 존재감 때문이다. 정적(正嫡)을 매장하려 총동원령을 내리는 것도 존재감의 부재 때문이다. 가장 큰 존재감은 도인(道人)이 되는 것이다. 사람들이 알아주든 말든, 하늘이 알아주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보고, 듣고, 느낄 때 뒤에서 묵묵히 지켜보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대상과 있었다가, 대상이 사라지면 어디론가 숨어 버립니다. 그것을 반야심경에서는 '관자재보살(觀自在菩薩)'이라고 합니다. 그것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또한 수련에 의해 깨끗하게 만들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 무슨 일을 하는지 전체적으로는 모릅니다. 하지만 그것과 하나 되면 세상 부러운 것이 없이 살게 됩니다. 그런 사람을 우리는 도인(道人)이라 부릅니다. 그것과 하나가 된다는 것은 어렵고도 쉽습니다. 우리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그것과 하나로 살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을 회복했다 할지라도, 단번에 세간(世間)을 떠나 출세간(出世間)에 안주하는 일은 쉽지 않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껴지는 것이 비록 무상(無常)하고 꿈같은 일임을 잘 알고 있다 할지라도, 세간의 감각적 재미를 완전히 포기한다는 것이 그리 쉽게 이루어지는 일은 아니기 때문이다. 백장야호(百丈野狐) 이야기가 있다. 전생(前生)에 나름 한소식을 했었던 한 도인(道人)이 하루는 백장을 찾아와, "대수행인(大修行人)은 인과(因果)에 떨어지지 않느냐"는 학인(學人)의 질문에, "떨어진다(不落)"라고 잘못 대답하여 500생 여우 몸을 받았다며 백장의 바른 답을 구했고, 그것에 단지 "어둡지 않다(不昧)"는 말로 간단히 해결해 주었다는 무문관(無門關)의 글이다. 사람은 기본적으로 보수적이지만, 내면에 진보..

노자는 말했습니다. 깨달음이란 "지식(知識)이 늘어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줄어드는 것이다"라고 말입니다. 세간(世間)에서 깨달았다는 것은 몰랐던 것을 알아 분별이 늘었다는 말이지만, 출세간(出世間)의 깨달음은 앎을 포기하고 자연무위(自然無爲)와 합일했다는 뜻입니다. 그것은 통찰(通察)이나 직관(直觀)같은 생각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 자리와 만나는 순간, 모두 녹아 하나( 理氣一元)가 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상락아정(常樂我淨)과 통합니다. 생사(生死)와 고락(苦樂), 유아(唯我), 무아(無我), 선악(善惡)을 모두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깨달은 이를 절학도인(絶學道人)이라고도 부르는데, 일 없는 가운데 몸과 마음은 늘 편안함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이 풍진(風塵) 세상 속에서 살고 있지만 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