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선도] 선도에서 바라본 견성 본문
견성(見性)이라는 말은 ‘성품(性品)을 보았다’ ‘깨달았다’는 말이며 적확치는 않으나 인도 말 보디(Bodhi)의 한자적 번역이라 보면 어떨까? 문화라는 것은 지역에 국한하지 않고 널리 통용되는 것이라서 그것이 중국에 전해질 때 그것에 거의 가까운 표현인 ‘견성’으로 번역했다고 본다.
현 불교문화가 상당한 부분 한자문화권의 영향을 받았으며 선불합종(仙佛合宗)의 견지에서 견성을 선도(仙道)의 의미로 새겨보는 것도 재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해 이 글을 쓴다.
선도 수행의 시작에 기(氣)를 체험하게 되는데 그것을 초견성(初見性)이라고 보는 것이 어색하지 않다. 왜냐하면 기 역시 존재의 본원인 허(虛)의 발현이기 때문이다. 깨달음을 기존의 인식에서 한 단계 점핑하는 것이라 본다면 기를 체험한 것 역시 한 단계 올라선 인식의 진화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싯다르타’는 깨달음에 네 등급(四果)을 두어 ‘수다원’, ‘사다함’, ‘아나함’, ‘아라한’이라 칭하였는데 일단 선도 수행자가 기를 여실하게 인지하게 된 상태를 불교식으로 ‘수다원’이라고 불러보자. 기를 인지한 것이 그 사람의 인생에는 혁명과도 같은 일일 것이기 때문이다.
‘수다원’을 예류(豫流)라 하여 하천에 비유하여 깨달음의 흐름에 겨우 참여한 것이라 볼 때 선도 수행자의 기체험 역시 일단 도(道)의 흐름에 참여했다고 보아야 한다.
그렇게 생각할 때 입문은 하였으나 아직 소주천(小周天)을 이루지 못한 상태를 ‘사다함(一來)’이라 하는 것이 좋겠고, 소주천을 이루고 희열 속에 기와 함께 사는 수준을 ‘아나함(不還)’이라 하는 것이 좋겠다. 그리고 연기화신(鍊氣化神)으로 밝음을 얻어 늘 진여(眞如)로 자재(自在)함을 얻은 것을 ‘아라한(無學)’이라 하고, 연신환허(鍊神還虛)의 완성을 무여열반(無餘涅盤)이라 한다면 큰 오차는 없으리라 본다.
*사다함(一來) : 한번 더 윤회가 필요한 단계. 그래서 일래라 한다.
*아나함(不還) : 윤회가 더 이상 필요치 않은 단계. 그래서 불환이다.
*아라한(無學) : 세상에서 더 이상 배울 것이 없는 단계. 해탈하였다하여 무학(無學)이라 한다.
선도에 입문한 사람은 필히 소주천을 이루어야 한다. 선도에서 소주천을 중요시 하는 이유는 불교에서 ‘아나함’을 불환(不還)이라 하여 중시하는 것과 같다. 일단 소주천에만 제대로 이르면 그때부터는 속계(俗界)를 떠나 선계(仙界)에 입문하기 때문이다.
그 후부터는 즐거운 나날을 살게 된다. 우울하거나 외롭지 않은 삶이 된다. 심신이 점점 건강하게 되며 쉽게 이치에 밝아지고 자기중심에서 떠나 세상을 바라보는 지복(至福)을 누리게 된다. 소주천에 이른 그를 견성(見性)한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 전혀 이상하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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