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중도 (5)
谷神不死
"하룻밤에 만리장성을 쌓는다"는 말이 있다. "하루를 살아도 천 년을 사는 것처럼" 사는 사람이 있고,"백 년을 의미 없이 하루처럼" 사는 삶도 있다. 미래를 위해 현생을 희생하며 사는 삶이 있고,현생의 돈과 권력에 몰두해 미래에 대해서 무지한 삶도 있다. 당신에겐 어느 쪽이 더 가치 있는가? 선도(仙道)의 입장은 현생과 미래의 비중을 반반 두며 사는 것이다.그리하기 위해서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닦는데, 그것을 성명쌍수(性命双修)라고 한다. 우리에겐 미래(死後)도 중요하지만, 신앙만으로 현재의 삶을 희생해서는 안 된다. 현실에 삶에도, 미래에도, 한발씩 걸치며 치우치지 않고 사는 삶,그것이 중도(中道)의 삶이 아닐까?
정치적 경향이 다른 신문 두 개를 함께 읽다 보면 혼란에 빠진다. 최근의 기사를 보면 한쪽은 성과가 컸다고 그의 업적을 찬양하는가 하면, 다른 한쪽은 오히려 후퇴했다고 그의 실적을 폄하하고 있다. 문제는 사안(事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고정된 입장(立場)에서만 사물을 보기 때문이다. 우산 장수와 짚신 장사 예를 들어보자. 똑같이 비가 오는데, 우산 장사는 반기고 짚신 장사는 시름에 잠긴다. 문제는 비가 오는 것에 있는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기 자신에게 있다. 헌 입에서도 두 말이 나올 수 있다. 어제는 "통일이 대박이다. 통일되면 수천조의 이익이 있다"고 말했는데, 오늘은 "나라를 송두리째 갖다 바치는 반역이다"라고 말한다. 역시 立場이 달라졌기 때문이다. 나는 어느 쪽 立場에 서 있는가? 그것을..
모두가 착하다면, 거기에 착한 사람은 없다. 우리가 진리(眞理)를 찾기 어려운 것, 그리고 깨닫기 어려운 것은 세상의 진리(眞理)는 너무 보편적이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전체를 보기 어려운 이유는 시각(視覺)이 편파 쪽으로 조정되어 있기 때문이다. 고정관념을 내려놓아야 한다. 그래야 본래면목(本來面目)인 자성(自性)을 보게 된다. 수행자는 종일 자기를 살핀다. 그리고 불필요한 것은 버린다. 내려놓는다는 것은 중도(中道), 양쪽을 여의고 바라보는 것이다. 하지만 있음이 없이 없음은 있을 수 없고, 있음 역시 홀로 있을 수는 없음은 분명하다. 있다, 없다, 옳다, 그르다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이 중도(中道)이다. 하지만, 있기도 하고 없기도 하고, 옳은 것 중에 그른 것이 섞여 있을 때, 더 큰 中道가 실현된다.
비트겐슈타인의 '생각하지 말라(Don’t think)'는 말은 잘못된 의미 부여를 하지 말라는 의미이다. 하지만 사물은 선입감 없이 바라본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그의 말 Just Look을 위해선 순수의식이 필요하다. 오류에서 벗어나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용수(龍樹)의 중도(中道)가 빛난다. 그리고 방하착(放下著)이 새롭게 다가온다.
생명 활동은 몸과 마음의 두 가지 활동으로 이루어지며, 이 두 활동이 서로 밀접하게 상호 보완하고 있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일이다. 감정은 그대로 육체에 전달되며, 육체의 조건은 그대로 감정에 영향을 준다. 기쁘면 몸이 가벼워지고, 슬프면 몸도 함께 무거워진다. 행복감이 오면 엔도르핀이 증가하며 얼굴색이 밝게 피어나고, 두려움이 일어나면 내분비에 이상이 생겨 맥박이 빨라지고 얼굴색이 흉하게 변한다. 그렇게 몸과 마음은 달리 생각하려 해도 달리 생각할 수 없는 것, 몸이 있어 마음이 있고, 마음이 있어 몸 역시 존재한다. 그러므로 ‘건강한 몸에 건강한 정신이 깃든다’는 격언이 있는가 하면, ‘건강한 정신이 건전한 육체를 만든다’는 가르침도 있다. 정신과 육체를 대립적, 이원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오랜 세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