谷神不死
아트만(Atman) 그리고 무아(無我) 본문
힌두교와 불교(佛敎)는 '나'라고 하는 영구적 실체(實體)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이 가능하다.
깨우침을 얻은 싯다르타는 "항상(恒常) 하는 것은 없다(無常)"에 이어,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無我)"를 설했으며, 그것은 브라만교를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던 아트만(Atman) 영구불변설(說)을 뒤집어엎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면 윤회설(輪迴說)은 단지 설(說)로만 끝나고 말 일이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입멸(入滅)한 후, 인도의 거의 모든 불교신자는 다시 브라만교에서 개명(改名)을 한 힌두교로 개종(改宗)하였으며, 불교는 인도 밖으로 옮겨갔다.
성경(the Holy Bible), 특히 구약(舊約)을 보면, "영혼은 죽으며(에스켈 18:4)", "온유한 의인들은 천당이 아니라 이 땅에서 영구히 살 것을(시편 37:10)" 기록하고 있다. 처음 창조될 때의 신(神)의 약속처럼 말이다. 예수가 이야기한 부활의 개념도 윤회와는 결이 다르다.
그런 점에서 싯다르타의 주장과 성경은 일부 일치한다.
우리는 무엇이든 신앙(信仰)할 수 있다.
그러나 팩트(fact)는 신앙과 다른 경우가 너무 많다.
하지만 신앙은 우리의 인생을 좌지우지할 정도로 그 영향력이 너무 크다.
붓다는 바른 견해(正見), 바른 사유(正思)를 팔정도(八正道)의 첫머리에 두었다. 그것이 신앙(信仰)보다 중요하기 때문이다.
깨어있는 자에게 바른 견해(見解)는 분명 신앙보다 먼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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