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선도 (66)
谷神不死
소주천(小周天)을 모르고 선도(仙道)를 말할 수 없으며 단전(下丹田)의 활성화가 없는 소주천은 역시 불가능하다. 선도의 순서는 1. 기(氣) 알아채기 2. 단전 가동사키기 3. 소주천 4. 태식(胎息) 이다. 몸이 열리기 전에 함부로 단전호흡을 말하지 말라. 먼저 단전부터 챙겨야 한다. 선도에서 단전은 절대적이다. 그리고 몸이 열려야 단전도 열린다. 복식호흡을 오래한다고 단전호흡이 되는 것은 아니다. 단전을 살려내기 위해선 먼저 코드가 맞는 스승을 만나야 하며 그를 절대적으로 신뢰해야 한다. 물론 노력이 필요하지만 스승과의 코드맞춤이 더 중요하다. 아니면 수행을 지속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선도의 마무리는 태식이다. 태식(胎息)은 2단계 단전호흡이며 소주천 이후에나 가능하다. 그것은 양신(陽神) 즉 에너..
소주천(小周天)이 없는 선도(仙道)는 선도가 아니다.소주천은 선도의 1차 관문이자 핵(核)이기 때문이다.선도의 1차 목표는 건강 그리고 기맥(氣脈)들이 잘 열려있을 때 우리는 건강하다.소주천은 임맥(任脈)과 독맥(督脈)의 활성화이며 그것은 전신 기맥들의 사령탑 이 된다.2차 목표는 양신(養神) 즉 에너지체를 만드는 것이다. 에너지체(陽神)는 기(氣)와 의식(神)의 계합체이며 에너지체가 완성될 때 우리는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살게 된다.소주천의 회전력은 氣를 청정하고 힘차게 만든다. 그리고 그것이 養神의 기초가 된다.
오온(五蘊)을 '나'라고 믿고 있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그것들은 조건에 의해 있는 것이므로, 조건이 다하면 자연 속으로 환원(還元)되고 말기 때문이다. 오온이 '나'라고 믿고 있는 그들에게, 당연히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웃고, 울고, 움직이는 것은 모두가 오온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자세히 살펴보라. 우리 사람에겐 五蘊을 작동시키는 무엇(에너지)이 있고, 그것을 지켜보는 '무엇'이 있다. 만약, 당신 의식이 에너지(氣)와 지켜보는 자에 맞춰질 수 있다면, 영영토록 존재할 수 있다. 선도(仙道)에서 기(氣)를 중시하고, 氣와 신(神)을 계합(union)시키려 애쓰는 이유는 그래서이다. 그 조건이 충족되는 한, 당신은 살아도 살고, 죽어도 산다.
싯다르타의 출가 목적은 어디까지나 생로병사의 해결이었다. 그는 오랜 고행 끝에 그 실마리를 풀었는데, 그것은 무아(無我)였고, 열반(涅槃), 즉 적멸(寂滅)이었다. 그것으로 그는 부처의 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중생(衆生)에게 밝히는 것을 꺼렸는데, 그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고 반길 중생은 없다는 것이었고, 부득이 꿩 대신 닭 격인 고(苦)의 해결책, 즉 사성제와 팔정도를 내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으며, 궁극적인 깨우침과도 거리가 멀었다. 해결해야 할 것은 苦의 당체인 자아에 대한 깨우침이었으며, 결국 그는 원인무효를 시키는 방편, 즉 無我를 주장함으로써 일단 문제를 봉합했다. 그라나 그것이 신박한 해결책이긴 했지만, 너무 비관적인 풀이라 대중의 문제해결책으론 많이..
선도(仙道)를 닦는 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선도를 닦아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하며 여러 가지 신통(神通)을 부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답니다. 능엄경 주석집을 써서 자기가 살던 집 천장에 숨겼는데,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불나기 전 누군가가 그것을 베껴 두었다는 말은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행적을 보고 누군가를 판단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아는 것 모두를 서슴없이 공개하는 법입니다. 변죽만 울리고 공개를 미루는 것은 뱀 장사가 하는 짓입니다. 그분의 말씀 중에 ‘마음을 항복 받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항복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직접 듣지 못해 섭섭합니다. 저의 개인 소견으로는 마..
깨달음을 가르치는 선생(스님)에게 물었다. "깨달으면 어떤 유익이 있습니까?" 그는 "질문이 틀렸다"라는 심오(深奧)한 대답을 했다. 하지만 지성(知性)을 가진 자는 더 나은 곳으로 나아간다. 본능(本能)에만 의지하는 짐승들과는 다르게 말이다. 싯다르타가 출가(出家)한 동기는 혼돈과 고통의 해결이었고, 그는 문제를 해결했다고 전해진다. 요즘도 많은 사람들이 깨닫기 위해 돈과 시간을 바친다. 어떤 이는 인생 전체를 깨달음에 밀어 넣는다. 그곳에 있을 때, 그들은 깨달음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산에서 내려와 세상과 며칠 살면, 다시 원래대로 돌아간다. 내가 만난 사람 중 진정으로 여여(如如)하게 지내는 사람은 극소수이다. 왜 그런가? 깨달음(?)만으론 부족해서 그런 것이 아닐까? 에너지가 받쳐주지 못해..
사랑받고 싶다면 먼저 사랑하는 법부터 배워야 한다. 누군가를 진정으로 사랑하면 누구나 상대에 맞춰 자신을 바꾸려 한다. 그리고 남들 앞에서 그 사람을 자랑하고 싶어 한다. 선도(仙道)를 사랑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자기를 바꿀 의사가 없다면 그의 공부는 발전하지 못할 것이다. 그리고 남들에게 仙道를 자랑하지 못한다면 그의 공부는 힘이 잃어 지지부진하다 끝나고 말 것이다. 선도를 한다고 하면서 과거를 청산치 못하고 질질 끌리며 사는 사람은 진정한 선도인이 아니다. 그런 사람에게 일체의 삶은 고(苦)일 수밖에 없다 그런 사람에겐 에너지가 생기지 않는다. 그런 사람에게 나는 에너지를 나누어 주고 싶지 않다.
선도(仙道)에 입문한 사람이 거쳐야 할 기초과정이 있는데, 그것을 백일축기(百日蓄氣)라 한다. 百日이란 蓄氣에 필요한 충분한 기간을 말하며, 사람이나 노력 여하에 따라 짧아지거나 더 길어진다. 蓄氣를 위해서는 외단공(外丹功)과 내단술(內丹術)이 필요한데, 아이가 생겨나기 위해 아빠와 엄마의 사랑이 필요한 것과 같다. 기법(技法)으로는 하복 중앙까지 이르는 부드러운 호흡과 하복 중앙에 대한 주시(注視)이다. 그것으로 잠자고 있던 단전(丹田)이 깨어난다. 마치 수정(受精)으로 임신이 되는 것과 같으며, 丹田이 활성화되지 않고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百日蓄氣 과정에서 소주천(小周天)이 이루어지며, 자연스럽게 도태(道胎)도 무르익어 간다. 蓄氣 이후에도 끝없는 관심(注視)이 필요한데, 기운이 부족해서는 ..
귀신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주장도 일리는 있다. 죽은 신(神)은 작용력이 없어, 젯상을 차려내도 먹지 못하고 단지 향음(鄕飮)만 할 뿐이다. 엔진과 밧데리가 없는 것을 자동차라 하기 어렵듯이, 사람(精氣神)이 죽어 정(精)과 기(氣)를 잃으면 사람이라 하지 않고 귀신(神)이라 한다. 하지만 무시해도 상관은 없는 존재다.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고,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선도(仙道) 수행은 비록 몸과 숨을 잃게 되더라도 神이 氣를 잃지 않아 작용력이 있는 존재가 되기 위함이다. 믿든지 말든지, 그런 존재를 가리켜 신선(神仙)이라 한다.
"왜 사는가?"라는 질문처럼 답하기 어려운 것은 없다. 철학자들 역시 직답을 피할 것이다. 기독교는 오직 조물주(神)에 대한 찬양이라 말할 것이고, 불교는 영원한 소멸(Nibvana)이라 할 것이다. 하지만 그런 것으로 우리가 만족되지는 못한다. 왜냐하면 그런 것은 우리와는 아무 상관이 없고 우리는 이미 삶의 목적지에 도달해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이미 서울에 도착해 있는 사람에게 왜 당신은 서울에 왔는가를 묻는 것과 같다. 물으려면 "이것으로 당신은 만족하는가?" 아니면, "다시 길을 떠날 것인가?"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 묻는다면 사람에 따라 다른 답이 나올 것이다. 혹자는 "피곤하다, 쉬고 싶다"고 할지 모르고, 혹자는 "나를 여기에 오게 한 궁극적 의미는 무엇인가?"라고 물을 수도 있다. 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