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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세상엔 세 부류의 사람이 산다. 상사는 도(道)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중사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하사는 도를 들으면 비웃는다. 반신반의하거나 비웃음이 없는 도는 도가 아니다. 노자(老子)의 말이다. 1. 돈과 권력, 명예를 좇으며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세상 사람의 99%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 이른바 하사(下士)다. 2. 무상( 無常)함을 깨우쳐 삶의 일체가 고통임을 알아채 세상과 유리된 삶을 사는 수행자를 자처하는 사람. 무아(無我)까지 깨우쳐 윤회를 넘어 이번 생을 마치면 다시는 세상에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염세적(厭世的)인 1%의 사람이 있다. 혹시 그런 사람이라면 중사(中士)다. 3. 희귀하기는 해도, 도(道)를 좇지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도와 합일한 사람, 1%에도 속할 수 없는..
세상에는 믿음으로 구원받는 사람과, 의심으로 구원받는 사람, 그리고 이도 저도 아닌 세 종류의 사람이 있다. 필자는 이중인격자이다. 그는 믿음과 의심을 반반씩 가진 사람이다. 그래서 온전한 신앙인이 되지 못했고, 시한부 종말론을 거부했다. 신앙인에게 의심은 금물이다. 신앙인에게 교리를 따지지 말라. 그들에겐 절대적 믿음, "믿습니다, 아멘"만 필요하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동기부여는 필요하다. 그리고 그들의 믿음이 흔들리는 이유는 눈에 보이는 확실한 동기부여가 부족하기 때문이다. 예수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요한의 침례 의식 중, 요단강 위에 나타난 비둘기 모양의 성령을 통해 자신이 사람의 자식이 아니라 하느님의 아들임을 확인했다. 열려있다고 알려진 김기석 목사를 만나, "어떻게 하면 믿음을 키울 수 있습니..
살아있는 사람의 관심사는 "나는 누구인가?"와 죽음이다. 별 관심 없이 사는 사람이 더 많지만 말이다. 그 둘이 모든 불안(不安)의 시작이다. 불안의 중심은 죽음이며, 그것이 고통을 부르는 제1원인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해결하는 방법은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신앙이고, 다른 하나는 수행이다. 신앙처럼 편한 것은 없다. 그것이 신앙이 세상에 만연하는 이유다. 어렵게 따지지 말고, 그냥 믿어버리면 만사 오케이이니 말이다. 하지만 그것(盲信)이 마음에 들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 사람은 스스로 깨우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수행(修行)이라 한다. 세상에 종교라 불리는 많은 신앙이 있는데, 용도는 단지 불안을 가라앉히는 것이다. 그것에 안주하면 임시적이지만 평안을 얻는다. 기독교는 예수를 믿으면 천국에 ..
신앙을 가진 사람은 진리를 깨우칠 수 없다는 말이 있다. 또한 그런 사람에게는 수행도 크게 필요 없다. 왜냐하면 신앙이란 이미 결정 난 사항이므로, 재론의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그에겐 오직 숭배 행위만 필요하다. 신앙에 대해 학문적 고찰은 어울리지 않는다. 그럴 때 신학이라는 것은 단지 신앙의 대변일 뿐이다. 하지만 수행자에게는 큰 신앙이 필요치 않다. 수행이란 자기를 닦아내 그 밑에 자리 잡은 진실을 밝히는 것이므로, 그에게 필요한 것은 신이나 부처에 대한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자신에 대한 믿음과 수행을 이어나갈 수 있는 최소한의 에너지만 있으면 된다. 철학과 인문학에만 몰두하는 사람이 있다. 그런 사람은 사유와 논리를 중요시하며 사는데, 만나보면 쓸데없는 이론에 너무 시간을 쓴다는 느낌을 받게 된..
우리가 살아가는 데 꼭 이해해야 하는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宗敎)이다. 부자든, 권력자든, 지식인이든 막론하고, 우리 모두는 갈팡질팡하며 사는데, 그 이유는 '종교'를 아직 모르기 때문이다. 종교란 으뜸(宗)이 되는 가르침(敎)이다. 그렇다면 자신에게 으뜸이 무엇인지를 물어봐야 한다. 사람마다 으뜸으로 생각하는 것이 다르기 때문이다. 종교를 논(論)하는데 있어서는 두 가지 관점이 있다. 그것은 진리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 아니면 신앙의 입장에서 바라볼 것인가이다. 보통 사람들은 종교와 신앙을 동의어로 생각한다. 하지만 그 둘은 전혀 다르다. '신앙(信仰)'이란, 믿어(信) 우러르는(仰) 것이다. 우리는 무엇도 신앙할 수 있다. 하늘 땅, 가공한 신(神)이나 돌부처에서 시작해 살인자, 마귀, 동물이..
"학교폭력을 없애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학교를 없애는 것이다"라는 농담이 있습니다. 우리는 신앙적 모순 속에서 삽니다. 석가는 "'나'라는 것은 없다"라는, 이전에 없던 진리를 발견했다고 주장합니다. 그것은 위대한 일입니다. 이제부터는 더 이상의 고통은 없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일체가 고통(一切皆苦)이라고도 말합니다. 없는 '나'에 어떻게 고통이 있을 수 있을까요? "인간은 신(神)을 찬양하기 위해 존재한다." 인간은 그를 '아버지'라고 부르면서도 어떤 일을 당해도 그에게 복종해야 한다고 합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간을 창조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는 사랑이다"라고 뇌까리며 살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그는 너무 잔인합니다. 그의 자식들의 편을 가르고 한 놈은 천당, 한 놈은 지옥으로 ..
도(道)와 마(魔)는 한통속 고르지 못한 날씨로 모종을 재구매하는 농가가 많습니다. 심은 오이, 호박, 고추, 강낭콩, 도마토 등등이 축 늘어졌습니다. 곡우(穀雨)를 지났지만, 갑자기 닥친 영하 가까운 기온 때문입니다. 하지만 직파(直播)한 작물들은 거의 피해가 없습니다. 식물들이 눈치껏 알아서 싹을 틔우기 때문입니다. 한국이 수행하기 적합지 않다는 티베트 승려의 글을 읽었습니다만, 나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여러 나라를 다녀 보았지만, 한국보다 수행하기 좋은 나라는 없다고 늘 생각합니다. 저절로 수행이 무르익지는 않습니다. 수행(修行) 역시 배고픔, 추위를 견디며 잡초처럼 닦아야 하기 때문입니다. 신앙단체에 적을 둔 수행자들은 예외입니다. 그들에겐 집 걱정, 먹을 걱정이 없습니다. 스님(?) 소리 들어가..
사람은 자기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알고 싶은 것만 알고, 믿고 싶은 것만 믿게 되어 있다. 그것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에 동일하게 진행된다. 자본주이냐 사회주의냐, 개인소득중심경제냐 전체소득중심경제냐, 수구(守舊)냐 개방(開放)이냐 등등 말이다. 그것은 신앙(信仰)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기독(基督)을 말하자면 구교(舊敎), 신교(新敎), 불도(佛道)라면 상좌부(上座部), 대승(大乘) , 아니면 선불교(禪佛敎), 이슬람이라면 시아파, 수니파로 나누어 이견(異見)이 분분하다. 사람은 완전한 깨우침을 얻기 전에는 자기가 믿고 싶은 것만 믿도록 구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오늘은 열반(涅槃)과 해탈(解脫)에 대하여 다시 생각해보자. 이 사안(事案)은 전에도 다룬 적이 있으나, 엄연히 다른 두 단어의 의미..
신앙(信仰)이란, '믿어(信)' '우러른다(仰)'는 뜻입니다. 사람들이 사이비에 빠지는 것은 무지(無知)와 통하기 때문입니다. 아는 자, 가진 자는 믿지 않습니다. 모르기 때문에 믿고, 구할 것이 있어 믿습니다. "우러른다"는 말은 "위를 향하여 정중히 고개를 쳐든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어떨 때 우러릅니까? 진정으로 존경심이 우러나올 때가 아닙니까? 돈을 우러르고 권력을 우러른다면... 먹을 것을 위하여 우러르는 짓을 하고 있다면 개돼지와 다를 바가 무엇이겠습니까? 세상은 깨어나고 있습니다. 왜 신(God)들의 세력다툼에 이용당해야 할까요? 지금은 깨달음의 시대입니다. 이것이 開闢(Open & Open)입니다.
수행자(특히 인도 수행자)가 苦行을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그들은 업(Karma)을 털어내기 위해 그리한다. 싯다르타도 처음엔 그들을 따라 산에 올라 오랜 시간 고행(苦行)을 해 뼈와 가죽만 남았었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총명함은 그것이 고(suffering)를 소멸시키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苦를 소멸시키는 원리를 깨달았다. 그의 알아낸 것은 내가 없다면 苦가 있을 수 없다는 원인무효법, 즉 무아(無我)이다. 그것은 불교의 기둥 교리가 되었다. 그 말대로라면 모든 것은 허망하다. 우리는 어떤 노력(수행)도 할 필요가 없다. 산다는 것이 코미디이다. 그들의 말은 다분히 논리적이어서 반박에 쉽지 않다. 우리는 혼란에 빠진다. 논리적이 아니라 실제로 나는 없는가? 그것은 그치지 않을 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