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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한국이 세계 자살률 1위 국가라고 한다. 어렵게 살던 시절보다 경제 강국이 된 지금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다. 윤리적, 종교적, 그리고 법적으로 자살은 죄이다. 그런데도.. 자살하는 사람이 줄지 않는다. 왜 그럴까? 자살은 타인이 이래라저래라할 수 없다. 오로지 당사자의 주관적 문제다. 자살하는 본인 입장에서 생각하면 그건 그 나름대로 최선의 선택이다. 자살은 죄라 할지라도 당사자에게 벌을 내릴 수 없다. 그는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말이다.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자살한다. 그러므로 자살을 방지하려면 희망을 주어야 한다. 오늘보다 내일이 더 나을 거라는 확신을 주어야 한다. 스스로 그리해야 한다. 신앙을 가진 사람도 자살한다. 죽어서 천당을 가든 지옥을 가든, 그것은 고..
믿음은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동일한 것에 대하여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생각은 다르므로 믿음도 다르다. 이 사람에게 성스러운 것이 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단지 생각이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대단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머리 속에 자리잡힌 생각 때문에 너무 쉽게 목숨을 내놓고 그 믿음을 주장하기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신앙을 이유로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살상이 자행되었는가? 믿음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다. 단지 축적된 지식과 정보, 즉 생각들이 엉켜서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이고 들릴 뿐이다. 선지식(善知識)의 말을 들어보자. "타인이 믿는다고...오래 믿어 왔다고...믿을 만한 사람이..
생각을 없앤다고 그저 멍때리고 있어선 안 된다. 그것은 나태함만 만들 뿐이다. 생각을 지켜보라. 생각의 조절을 위해 우선 지켜볼 수 있어야 한다. 생각을 조절해야 하는 이유는 유용한 생각을 일으키기 위함이다. 고요히 하복부(丹田 자리)를 지켜보다 보면 잡생각들이 사라지고, 단순한 지켜봄만 남게 된다. 그것이 나를 성공시키는 첫걸음이다. 모든 일은 생각으로부터 시작된다. 그것이 집중을 낳고, 의지를 일으킨다. 그것은 당신을 일으켜 세울 수 있으며, 가라앉게 할 수도 있다. 생각을 지켜본다는 것은 당신이 생각의 주인이 된다는 것이다. 도움이 되지 않는 생각들을 사라지게 하고 유익한 생각들을 키워나갈 때 당신의 발걸음은 성공을 향한다. 인생은 단 한 번뿐이다. 그리고 한 생각이 인생을 바꾼다. 당신을 성공자로..
우리가 깨어있어야 하는 이유는 그것만이 실존(實存)이기 때문이다. 색(色)이 공(空)이든, 空이 色이든, 우리의 생각은 존재의 증거이다. 인생을 무의미하다고 하지 말라. 그것은 배부른 돼지의 헛소리이다. 實存을 알려면 "지금 여기"에 충실하면 된다. 남들이 간다고 가지 말고, 믿는다고 맥 없이 따라 믿지 말라. 삶이란 도화지에 그림 그리기이다. 토끼를 그리든, 호랑이를 그리든, 그것은 전적으로 그리는 자의 소관(所觀)이다. 삶의 의미를 묻지 말라. 삶의 의미는 정해진 것이 없으며, 스스로 만들어 가는 것이다. "나는 생각한다. 그리고 존재한다"고 누군가 말했다. 하지만 존재하지 않으면 생각도 불가능하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철학자의 말입니다. 철학은 생각을 통해서만 존재합니다. 그러나 그런 존재는 진정한 존재가 못 됩니다. 생각이 끊어져야 그 자리에 진정한 존재가 출현합니다. 그것을 본래면목, 진여(眞如)라고 합니다. "선善도 생각지 말고, 악惡도 생각지 말라. 오직 생각 이전의 본래면목을 깨우치라." 육조(六祖) 혜능(慧能)의 말입니다. 사티(Sati)는 생각 이전을 알아채는 능력을 기르는 것입니다. 진정한 존재를 밝히려면, 생각 이전을 알아채야 하기 때문입니다. 철학자와의 대화는 너무 어렵습니다. 그들은 생각으로 존재하기 때문입니다.
일어나는 생각을 없애려고 하지 마세요. 무엇이 생각을 일으키는가 살펴보세요. 그것을 회광반조(回光返照)라고 합니다. 생각을 없애려 하면 생각을 없애려는 그 생각이 나를 더 괴롭힙니다. 생각이 일어나든 말든, 그대로 두고, 생각이 어디서 일어나는가에 관심을 두면 생각이 힘을 잃습니다. 그것을 체험하게 되면 그다음부터는 다른 세상을 살게 됩니다. 내가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되면서 남도 자연스럽게 나를 괴롭히지 않게 됩니다. 그냥 날마다 좋은 날이 됩니다.
생각보다 먼저 있고, 생각 후에도 여여(如如)한 고요한 실재, 누구에게나 있는 '그것'을 알아채는 것이 깨달음이다. 그것을 알아채고 나면 일단 근심 걱정이 사라지고, 외로움과 우울한 느낌이 힘을 쓰지 못한다. 집착이 줄어들어 무리하게 일을 추진하지는 않지만, 진정으로 원하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는 법은 없다. 그것이 만물의 주체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모르고 그것의 가치를 부여하지 않고 살기 때문에 사람들은 돈과 명예를 좇으면서도 늘 불안하고 만족이 없이 사는 것이다. 관점을 조금만 바꾸면 바로 그 자리에 들어갈 수 있는데...
수행자와 일반인의 차이는 생각에 있다. 수행자는 자기 생각을 자기가 하고, 일반인은 남의 생각에 의존한다. 수행자는 남의 생각에 좌지우지되지 않는다. 남의 생각에 좌지우지되는 순간, 그는 생각의 노예가 되고 만다. 생각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것, 그것이 깨달음이다. 생각으로 생각을 제어할 수 있어야 한다. 거기서 초능력도 나온다.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 생각을 한다는 것은 생각하는 주체가 있다는 것이며, 그것이 '나라는 존재'를 증명한다는 데카르트의 가설이다. "나"라는 존재가 있다는 것은 그것을 있게 한 무언가가 있을 거라는 가설(假說)에 기초하여 인간들은 각기 자기 입맛에 맞는 神들을 조작(造作)하고 그것들을 우러르며 믿는다(信仰). 심지어 불교는 제법무아(諸法無我), 즉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를 주장한 시타르타마저도 신격화(神格化)하여 그의 상(像)을 만들고 그 앞에 엎드리고 있다. 생각이 없다면 과연 나는 없을까? 미미하고 무어라 말하기는 어려워도 생각이 없다는 것, 내가 사라졌다는 것을 알아챈 '그놈'은 끝까지 남지 않던가? 그것을 알아챘다면 당신은 문 하나를 통과한 셈이다. 나는 누구인가?
본성(本性)에 대한 바른 깨달음이 있는 사람은 조건의 구애를 받지 않는다. 하나같은 깨달음 속에서 늘 자유롭다. 사마디(Samadhi) 속에만 머물려는 사람이 있다. 편안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하지만 누구로부터 성자(聖者) 소리를 들을지는 몰라도, 그런 사람은 깨달은 사람이 아니다. 담배, 술, 마약, 채팅과 게임, 그리고 명상(?)을 통한 삼매(三昧)를 즐기는 사람들이 있다. 무엇을 좀 안듯 산속으로 들어가 조용히 살기를 희망하는 사람(자연인)들도 너무 흔하다. 그러나 그것은 진정한 편안함이 아니다. 특정 조건에서의 편안함이기 때문이다. 순경계(順境界)이든, 역경계(逆境界)이든, 가리지 않고 편안해야 바른 깨달음이다. 깨달은 사람은 굳이 무념무상(無念無想)조차 말하지 않는다. 그는 생각 속에서도 늘 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