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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손가락

불교도 신앙이다

알아챔 2024. 3. 17. 09:51

싯다르타의 출가 목적은 어디까지나 생로병사의 해결이었다.

그는 오랜 고행 끝에 그 실마리를 풀었는데, 그것은 무아(無我)였고, 열반(涅槃), 즉 적멸(寂滅)이었다.
그것으로 그는 부처의 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중생(衆生)에게 밝히는 것을 꺼렸는데, 그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고 반길 중생은 없다는 것이었고, 부득이 꿩 대신 닭 격인 고(苦)의 해결책, 즉 사성제와 팔정도를 내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으며, 궁극적인 깨우침과도 거리가 멀었다.

해결해야 할 것은 苦의 당체인 자아에 대한 깨우침이었으며, 결국 그는 원인무효를 시키는 방편, 즉 無我를 주장함으로써 일단 문제를 봉합했다.

그라나 그것이 신박한 해결책이긴 했지만, 너무 비관적인 풀이라 대중의  문제해결책으론 많이 부족했다.

대승불교가 상락아정(常樂我淨)을 주장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우리는 적멸이 아닌 다른 해결책을 찾아야 했다. 그것은 바로 해탈(解脫)이다.

불교가 열반과 해탈을 얼버무려 동의어로 사용하지만, 그 둘은 전혀 다른 의미이다.
참고로 해탈은 그 출처가 힌두교이다.

오늘날 우리는 힌두교와 불교의 차이를 발견하지 못하는데, 아마 바라문교에서 탈피하려 했던 지하의 석가로서는 심한 허탈감에 빠질 것이다.

대승불교의 간화선이 초기 불교와 결을 달리하는 것은 그런 이유다.

대승과 소승의 차이는 가톨릭과 개신교보다 더 크다.

불도와 선도는 말할 필요 없이 큰 차이가 있다.

仙道는 돌려 말하지 않는다.
無我를 말하지 않으며, 苦를 거부하지도 않는다.
苦와 樂을 하나로 보며, 樂으로 마무리 짓는 것이 수행의 목표다.

생로병사의 해결에만 초점을 맞추는 것이 선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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