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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무아(無我)와 자아(自我)에 대해 간단히 말하자. 인식(認識)한다는 것은 존재(存在)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존재하지 않는 것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이다. ‘나’를 인식하는 사람에게만 ‘나’는 실재한다. 그리고 ‘나’를 인식하지 못하는 사람에게 ‘나’는 없다. 왜 ‘나’ 말고 진아(眞我)라는 말을 끌어와야 하는가? 그것으론 부족한가? 지금 이 ‘나’는 허깨비인가? 아니면 없애야 할 대상인가? 누가 뭐라고 말해도 여기 ‘나’는 있다. 있는 것을 없다고 한다고, 그것이 없어지지는 않는다. ‘나’는 여기 이렇게 성성(惺惺)하지 않은가? 인식이 있는 한 ‘나’는 언제나 여기 있다.
싯다르타는 명쾌했다. 그것이 그의 위대성이다. 그는 무상, 고, 무아라는 간단한 이치를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만 살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무상(無常)이 고(苦)를 낳지만, 무아(無我)라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불교는 너무 복잡하다. 파벌도 파벌이지만, 가르침도 상이하다. 간단히 無我라 알고 살면 쉬울 것을, 힌두로부터 진아(아트만)와 윤회를 끌어들인 것으로 부족해, 용수(龍樹)의 중관(中觀)에 요가로부터 유식학(唯識學)까지 가져왔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신앙할 것인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 미궁(迷宮) 속에서 쉼 없이 허덕일 것인가라는 기로(岐路)에 서야 한다. 진리는 쉽고도 명료해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불교의 핵심을 말하자면,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즉 무아(無我)이다. 그것이 싯다르타 깨달음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라문교(힌두교)는 유신론이다. 창조, 유지, 파괴를 담당하는 삼주신(Trimurty로서 Brahma, Vishunu, Shiva)을 신앙하며, 개체적 자아인 Atman이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Brahman과 합해지는 것을 최종적 희망으로 생각한다. 그 신앙 체계를 뒤엎은 것이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 체계는 거의가 無我를 증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승(大乘)이 출현하며 힌두의 윤회까지 받아들이더니, 無我가 진아(眞我)라는 해괴한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부처의 가르침인 無我를 부정할 수는 없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
'무아(無我)'를 이야기하기에 앞서, '나'에 대하여 먼저 생각해 보는 것이 순서다. 자기를 아는 사람을 가리켜 지성인(知性人)이라 한다. '나'는 정기신(精氣神), 즉 육체와 에너지(氣) 그리고 정신(의식)으로 구성된 종합체이며, 쉼 없이 변하는 존재다. 그러므로 어제의 나는 내가 아니며, 오늘의 나도, 내일의 나도 나는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없다. 무상(無常)하기 때문이다. 나를 대표할 만한 것은 '의식(意識)'이다. 어떤 의식을 가졌느냐가 나의 가치이며, 그것이 우리가 공부해야 하고, 깨우침을 얻어야 할 이유다. 의식은 공부량에 따라 진보하며 영원한 존재다. 그것은 육체가 흩어져도 에너지가 끊겨도 없어지지 않는다. 살아서 몸과 에너지를 어떻게 관리했느냐에 따라 사후의 나는 다른 존재가 되..
깨달음이란 즉시 알아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것을 '돈오(頓悟)'라고 합니다. 깨달음은 단지 '내가 누군지를 아는 것'입니다. 교리(敎理)가 아니며, 배우거나 믿어서 얻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배운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깨달음은 멀어집니다. 학문으로 덮으려 하기 때문에 내가 점점 괴물이 되는 것입니다. 그것을 위해서는 다리를 틀고 앉을 필요도 없고, 가족을 버리고 산속으로 숨을 필요는 더더구나 없습니다. '지금 여기' 이렇게 있는 것이 바로 '나' 아니겠습니까? 그것은 무아(無我)도 아니고, 참나(眞我)도 아닙니다. 그것을 가지고 무아(無我)니, 진아(眞我)니, 따지는 것부터 깨닫기 싫은 핑계입니다. 깨달음을 어렵다고 하는 이유는 자기를 아는 것이 두렵기 때문입니다. 한 번도 만나 본 적이 없으며, 만났다..
'무아(無我)'를 믿고 있다면, 세상 살아가기가 아주 곤란할 것이다. 일단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자기가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양도해야 한다. 그래야 정말로 '나 없음'이 증명될 것이니 말이다. 재물과 권력, 명예 정도를 양도하기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 그리고 자기주장과 믿음까지 모두 포기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내가 숨 쉬며 살아있기 때문에... 주장을 할 때도 거기엔 '내'가 있다. 배가 고프면 배고픈 걸 알고, 졸리면 졸린 줄 알고, 죽비 소리에 깜짝 놀라는 바로 '그놈' 말이다. 이른바 '참나', 즉 진아(眞我)라 부르는 그놈, 우리가 깨닫기가 어려운 이유는 없는 그것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생긴 적도 없었고, 사라지지도 않는 ..
스나이퍼가 일을 할 때는 가급적 장애물 없이 타켓을 정확히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해야 한다. 깨달음(見性)을 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각자의 입장에서 설명을 진행하고 있으므로, 헷갈리다가 잘못되면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깨달아야 할 것은 한둘이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키워드 하나만 확실하면 연쇄해서 하나하나 풀린다. 1700 공안(公案) 중 하나가 열리면, 나머지가 모두 열린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단연 공안의 대표는 "이뭣고", "나는 누구인가"일 수밖에 없다. 무아(無我)니, 연기 중도니, 열반이니, 하는 4차원적인 말들은 나중에 살펴도 된다.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 무상(無常)한 것, 시공(時空)에 묶여있는 것들부터 하나하나 제하여 본다..
이 몸과 마음은 내가 아니다. 지구에 있는 동안 빌려 쓰는 것이다. 빌려 쓰는 것이니 함부로 하지 말고, 잘 쓰다가 되돌려놔야 한다. '나는 없다(無我)'라는 주장이 있다. 일견(一見) 있어 보이는 주장이다. 그 말은 몸과 마음에 시달리는 사람에게 평안을 준다. 그렇다면 나는 없다고 주장하는 그놈은 누구일까? 몸과 마음을 이리 끌고, 저리 끌고 하는 그놈은 누구인가? 늘 몸과 마음을 지켜보던 그놈은 누구인가? 과연 몸과 마음을 빼고 나면 아무것도 남는 것이 없는가? 몸과 마음을 움직여 왔던 원동력의 출처는 어디인가? 그 원동력은 무엇에 근거해 존재하는가? 정말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는가? 선도(仙道)는 그렇게 알지 않는다. 그 원동력을 기(氣)라고 하고, 氣는 의식(神)에 근거해 작용한다고 안다. 선..
수행이란 자기를 유연하게 하는 것이다. 자기만을 세우지 않고, 내려놓는 마음을 일으키는 것이다. 수행은 믿음이 아니므로 "나는 없다(無我)"는 말로 자기를 세뇌해서는 안 된다. 내가 없다면, 세상도, 하느님도, 부처도 없으며, 수행조차 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수행이란 자기를 알아가는 여정(旅程)이다. 한 꺼풀, 한 꺼풀씩 자기를 벗겨, 본래면목(本來面目)으로 다가간다. 그것을 불가(佛家)에선 "원래 부처가 부처임을 확인한다"고 하고, 선가(仙家)에선 "신선(神仙) 자리를 회복한다(回仙)"고 한다.
"망둥이가 뛰니, 꼴뚜기도 뛴다"는 말이 있다. 철학을 한다는 모모의 서양 사람들이 무아(無我)를 들고나오는 것을 보면서, 그들이 과연 게 맛(?) 정도는 알고 그리 말하는지 안쓰러운 감이 든다. 無我의 삶이란, 최소한 있는 듯, 없는 듯한 삶이어야 하지 않을까? 무아(無我)를 주장하려면, 당연히 무아답게 삶의 모양이 소박해야 하고, 무아답게 죽음을 맞이할 수 있어야 한다. 소유욕에 찌들고, 죽음의 공포로부터도 자유롭지 못하다면, 그것은 위선(僞善)이 아닐 수 없다. 또한, '무아'의 가정(假定)에서 실존(實存)이니, 진아(眞我)를 논하는 것처럼 우스꽝스러운 일은 없다. 그렇다고 물에 술 탄 듯, 술에 물 탄 듯, 엉거주춤 살라는 말은 아니다. 관리하면서 사는 삶이 아름답다. 자연무위(自然無爲)를 그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