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和光同塵 (514)
谷神不死
함부로 자타일여(自他一如)를 말하지 마십시오.그러다 큰코다칩니다.잠시 상대와 내가 하나로 느껴졌다고 '우리는 하나다'라고 함부로 말하지 마십시오저의를 의심받게 됩니다.'나는 우주다'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참으세요.남들은 정신 나갔다고 생각합니다.먼저 '그 자리'를 찾도록 하십시오.그리고 그 자리에 안주하십시오.그 자리엔 같은 것도 다른 것도, 나도 없고 너도 없고, 우주도 하느님도 없습니다.그 속에 살지 못하는 한, 그리 말하지 마십시오.그 속에 살고 있어도 혼자만 알고 있으세요. 누구도 믿지 않습니다.
싯다르타는 명쾌했다. 그것이 그의 위대성이다. 그는 무상, 고, 무아라는 간단한 이치를 말했다. 그리고 그렇게만 살면 모든 문제는 해결되었다. 무상(無常)이 고(苦)를 낳지만, 무아(無我)라는 한마디로 모든 문제는 사라져 버리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날의 불교는 너무 복잡하다. 파벌도 파벌이지만, 가르침도 상이하다. 간단히 無我라 알고 살면 쉬울 것을, 힌두로부터 진아(아트만)와 윤회를 끌어들인 것으로 부족해, 용수(龍樹)의 중관(中觀)에 요가로부터 유식학(唯識學)까지 가져왔다. 불교에 입문하는 사람은 선택해야 한다. 따지지도 묻지도 말고 신앙할 것인가, 아니면 풀리지 않는 미궁(迷宮) 속에서 쉼 없이 허덕일 것인가라는 기로(岐路)에 서야 한다. 진리는 쉽고도 명료해야 한다고 배운 사람들에게 말이다.
수행을 하는 중에 더러 뻥 뚫린 허공을 체험하는 경우가 있다. 한마디로 체험은 체험일 뿐, 그것은 깨달음이 아니다. 함부로 전체 의식을 들먹이지 말라. 그것은 삼차원의 이야기가 아니며, 의식(意識)을 지니고 있는 한,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잠시 멍한 상태에 있었다고 전체 의식을 체험했다고 하지 말라. 단지 멍때리고 있었을 뿐이다. 먼저 에고를 알아차려라. 그것이 자기를 아는 첩경이다. 남의 목장 소가 몇 마리인지 세지 말라. 우리 안에 있는 내 소에 정성을 들여라. 남의 목장 소만 넋 놓고 보고 있다가 내 소가 난동을 부릴지 모른다. 에고에 집중하라. 그것이 에고에서 벗어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길이다. 전체 의식은 연신환허(鍊神還虛), 즉 神 공부가 마무리된 연후에나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무엇을 주시(注視)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마음은 그곳으로 옮겨간다. 그다음은 마음의 방향성인데, 시각화(視覺化)가 그 일을 한다. 그리고 그 내용에 따라 우리의 삶은 변해간다. 가급적 원치 않는 것, 피하고 싶은 것을 시각화해서는 안 된다. 예를 들어, '쥐를 박멸해야 해'라고 할 때, 우리는 먼저 쥐를 떠올린다. 그 습관을 극복하지 멋하는한 우리는 쥐와 함께 ㅅ살 수빆에 앖다. 생각에는 일어나는 생각과 일으키는 생각이 있다. 일어나는 생각들에 늘 깨어있어야 한다. 아니면 남이 원하는 삶을 살게 된다. 일으키는 생각으로 일어나는 생각을 통제하며 살아야 한다. 그것이 내가 원하는 삶을 사는 비결이다. 의수단전(意守丹田)은 생각 조절 훈련에 가장 좋은 방법이다. Energetic한 삶은 물론, 시각화를..
인간에겐 두 개의 에너지(氣) 루트가 있다. 그 하나는 심장을 중심으로 이루어지며, 다른 하나는 단전(丹田)이 중심이다. 기운에는 선천지기와 후천지기가 있는데, 심장은 후천지기(後天之氣)를 움직이는 센터가 되고, 선천지기(先天之氣)는 하단전(下丹田)을 중심으로 이루어진다. 생명은 하단전에서 시작하고, 태어나 폐로 호흡이 옮겨가면서 기운의 중심이 심장으로 옮겨가는데, 그때부터는 후천지기가 에너지의 중심이 된다. 에너지의 원동력은 언제나 하단전에 자리 잡고 있다. 그러므로 선도를 닦으려면 먼저 단전부터 활성화시켜야 한다. 수행이란 선천지기를 회복시키는 것이며, 그것을 위해서 단전호흡이 필수적이다. 그래야만 생명의 근원 자리인 본래면목과 마주할 수 있기 때문이다. 바른 소주천을 위해서는 단전의 재가동이 절대적..
"나"라는 것이 있느냐 없느냐, 그것은 수행자가 제일 먼저 가려내야 할 화두(話頭)다. 모든 것의 중심은 누가 뭐래도 '나'이기 때문이다. 불문(佛門)에서 ‘나’라는 것은 제거해야 할 대상이다. 그들은 열심히 '내가 없다(無我)'는 것을 말하고, 심지어는 최면을 걸어서까지 자기가 없다는 것을 마음에 심으라고 역설한다. 그렇게 하는 근거로는 오온(五蘊: 色受想行識)을 '나'로 규정하고 오온 중 어떤 것에도 주체(主體)가 없다는 것을 들이댄다. 그들의 말을 경청하다 보면 일견(一見) 일리(一利)가 있다는 것을 알 수는 있으나, 과연 나를 구성하는 요소가 오온이 모두인가에 다다른다면 의문이 그치질 않는다. 선도(仙道)에서의 사람 구성요소에는 오온(五蘊) 외에 기(氣)와 신(神)이 있으며, Bible에도 코에 ..
자기를 지켜보고 스스로를 설득할 수 있는 사람에게 퇴마(천도 의식)는 무용하다. 귀신이란 것이 허망한 것이고, 내가 허락하지 않으면 작용이 불가능한 존재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리고 내가 주인임을 잊지 않는 사람에게 퇴마(천도 의식) 같은 것은 필요치 않다. 하지만 심약한 사람, 심지(心志)가 흔들리는 사람, 자기를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에겐 그런 의식이 더러 필요하다. 시간이 가면 갈수록 그 상태가 깊어질 것이고, 결국은 폐인이 되고 말 가능성이 높아지기 때문이다. 빙의라고 해서 꼭 외부로부터 온 어떤 영적 존재를 말하는 것은 아니다. 자기 속에 이미 여러 인격이 자리 잡고 있으며, 그것 중 하나가 주도권을 가지는 것을 내빙의(內憑依)라고 한다.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편의상 우리 삶에 문제를 일으키는 빙의(憑依)만을 빙의라 하기로 한다. 빙의에는 두 가지가 있는데, 하나는 내부에 잠재되어 있는 신(神)에 의한 빙의이고, 하나는 외부 귀신에 의한 것이다. 내부의 신에 의한 빙의는 설득이나 약간의 푸닥거리로도 퇴치가 가능하지만, 외부 귀신이 들린 것이라면 웬만한 수단으로는 퇴치가 쉽지 않다. * * * 빙의는 보통 신경쇠약, 조울증, 조현병, ADHD를 앞장세운다. 빙의에도 저급 귀신의 빙의와 고급 귀신의 빙의가 있다. 저급의 귀신은 자신과 타인에게 소소한 어려움을 주지만, 고급의 귀신은 다르다. 경우에 따라 일시적 이로움을 주기도 하지만, 정치, 사회, 문화적으로 억압이나 파괴 등 세상에 나쁜 영향을 끼친다. 또한 결정적 순간이 아니면 빙의 상태를 잘 드러내지 않고, ..
자기를 둘로 나누지 말라. 나라는 것은 몸과 마음, 그리고 에너지(氣)의 종합체이다. 그중 하나만 부실해도 행복한 삶을 살 수가 없다. '참나'라는 것을 찾아야 한다는 사람이 있다. 그것은 마치 토끼 뿔, 거북이 털을 찾는 것과 같다. '참나'라는 것은 바로 나 자신이기 때문이다. 에고(ego)를 버려야 한다, 심지어 죽여야 한다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그것처럼 위험한 일도 없다. 사전을 찾아보지 않아도, 에고는 나 자신, 즉 자아(自我)이기 때문이다. '참나'라는 조작된 것에 속지 말고, 에고를 죽이려 하지 말라. 나를 먹여 살리는 것이 바로 에고이기 때문이다. '참나'와 '에고'는 둘이 아니다. 에고는 버리거나 죽일 대상이 아니라, 또 하나의 에고(Superego)에 의해 훈련되고 다듬기만 하면 되는..
세상엔 세 부류의 사람이 산다. 상사는 도(道)를 들으면 힘써 행하고, 중사는 도를 들으면 반신반의하고, 하사는 도를 들으면 비웃는다. 반신반의하거나 비웃음이 없는 도는 도가 아니다. 노자(老子)의 말이다. 1. 돈과 권력, 명예를 좇으며 건강하게 오래 살고 싶은, 세상 사람의 99%를 차지하는 평범한 사람, 이른바 하사(下士)다. 2. 무상( 無常)함을 깨우쳐 삶의 일체가 고통임을 알아채 세상과 유리된 삶을 사는 수행자를 자처하는 사람. 무아(無我)까지 깨우쳐 윤회를 넘어 이번 생을 마치면 다시는 세상에 오지 않기를 바란다는 염세적(厭世的)인 1%의 사람이 있다. 혹시 그런 사람이라면 중사(中士)다. 3. 희귀하기는 해도, 도(道)를 좇지 않고 거부하지도 않는 도와 합일한 사람, 1%에도 속할 수 없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