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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구원이란 고통과 죄악으로부터 건져지는 것, 그것의 결과로 영생을 얻는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도 없지만, 그렇다고 "믿습니다" 라는 말을 반복한다고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행위가 따라야 한다. 성경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 2:26)'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기를 알아야 진정한 구원이 있다. 구원받을 대상자가 바로 '자기'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누구란 걸 알려면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누구에게 배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얻어 들은 자기는 자기가 아니니 말이다. 자기를 알려면 깨달아야 한다. 깨달아야만이 제대로된 자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리를 이해하게 된 것을 깨달음이라 하는 교파가 있지만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믿는다. 깨달음은 지식에서 얻는 것이 ..
세상이 나를 알아봐 주기를 기대하지 말라. 내가 세상을 알아봐 주면 된다. 스스로 밀려왔다가, 언제 그랬느냐는 듯 썰물처럼 밀려 나가는 것이 세상이다. 일이 실패되었다고 낙담하지 말라. 변수는 언제나 작용한다. 바늘구멍 하나에 산 같은 제방도 무너지는 법이다. 아무리 애를 쓸지라도, 그것에 미치는 나의 힘은 고작 50% 미만이다. 사랑을 믿지 말라. 그가 나를 사랑한다고 믿지 말라. 기대가 어긋나면 사랑도 떠난다. 오는 사람 막지 말고, 가는 사람 잡지 말라. 누구도 믿지 말고, 오직 나를 갈고 닦아 이용 가치를 높여라. 자기에게 유용하면 쓰고, 가치가 떨어지는 순간 내던져지는 것이 세상의 순리다. 끝까지 남는 것은 오직 나 자신뿐이라는 것을 늘 기억하라. 그것이 내가 세상에서 해야 할 모두다.
살다 보면 깊은 절망감에 빠질 수 있다. 그때는 돈을 잃었을 때도 아니고, 시험에 떨어졌을 때가 아니다. 오직 믿고 있던 사람으로부터 '나를 믿지 말라'라는 말을 들었을 때이다. 당신에게 그런 일이 닥친다면 어떻게 행동해야 할까? 결코 실의에 빠져 자포자기해서는 안 된다. 그것을 하늘이 주는 큰 선물로 생각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런 사람이라야 함께 지혜를 논할 수 있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라는 유명한 말이 있다. 가슴에 새기고, 또 새겨야 할 말이다.
믿음은 생각에 의해 만들어진다. 동일한 것에 대하여 이 사람과 저 사람의 생각은 다르므로 믿음도 다르다. 이 사람에게 성스러운 것이 저 사람에게는 아무런 의미가 없는 경우가 너무 많다. 단지 생각이 그렇게 만들고 있기 때문이다. 믿음이 대단한 것은 사람들이 그것을 지키기 위해 목숨까지 걸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머리 속에 자리잡힌 생각 때문에 너무 쉽게 목숨을 내놓고 그 믿음을 주장하기 위해 살인도 서슴치 않는다. 신앙을 이유로 역사상 얼마나 많은 살상이 자행되었는가? 믿음의 뿌리를 들여다보면 거기엔 아무것도 잡히는 것이 없다. 단지 축적된 지식과 정보, 즉 생각들이 엉켜서 무언가 그럴듯하게 보이고 들릴 뿐이다. 선지식(善知識)의 말을 들어보자. "타인이 믿는다고...오래 믿어 왔다고...믿을 만한 사람이..
당신의 주인(主人)은 누구인가? 주인이 중요한 이유는 그것에 따라 자기 인생이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이란 것이 있다. 미신(迷信)에 의지하지 말고, 오직 주체(主體)가 되는 자기 자신에게만 의지하라는 바람직한 사상체계다. 그것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는 폐단이 난무하고 있지만 말이다. 사실상 주체사상처럼 좋은 건 없다. 그것은 곧 깨달음으로 이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깨닫기 어려운 이유는 무언가에 의지하려는 우리 안의 속성 때문이다. 그것은 주체가 무언지를 알려 하지 않게 만든다. 그것이 왕왕 믿음의 대상을 주체로 치켜올리는데, 그 대상은 예수가 되고, 부처가 되고, 단군이 되고 사회주의, 자본주의도 되고 김일성, 윤석열도 된다. 주체가 그런 것들을 주체로 치환(置換)시켜 버리기 때문에 일어나는 일들..
밭에 고추 모종을 심으면 고추가 열리고, 토마토를 심으면 도마토를 딸 수 있다는 것을 의심하는 사람은 없다. 마찬가지로, 마음 밭에 건강을 심으면 건강해지고, 돈을 심으면 돈이 생긴다. 문제는 의심 때문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에게는 일어나는 모든 일이 당연하다. 일어날 일이기에 일어나는 것이다. 의심하지 말고, 그렇게 믿고, 그렇게 행동하라. 마음의 밭을 가꾸고, 거기에 바라는 바를 심어라. 그리고 당연하다 생각해라. 당연히 원하는 결실을 얻을 것이다.
우리는 정신력을 사용해 원하는 것들을 끌어올 수 있다. 믿음, 열망, 기대, 그리고 기다림만 준비되었다면 말이다.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는 이유는 자기에 무지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무한한 존재라는 데 무지하다. 그러므로 돈과 권력 등, 아무리 많은 것을 얻어도 마음은 충족되지 않는다. 진정한 만족은 자기가 누군지 알아차리는 것에서 출발한다. 내가 누군지를 알기 위해서 지금 없는 무엇이 필요하지 않다. 몸을 고르고(調身), 호흡을 가다듬으며(調息), 마음을 알아차리기(調心)만 하면 된다.
여기 빚을 진 사람이 있습니다. 그는 헤어나기 위해 소비를 최소화하고, 10년 동안 고생고생해 빚을 모두 갚았습니다. 하지만 얼굴에 철판 깔고 오래 버티면 빚을 안 갚고도 해결하는 길이 있습니다. 얌체 같은 짓이지만 말입니다. 그것 역시 10년이면 얼추 해결됩니다. 행위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구원받는다는 말이 Bible(에페소서 2:8,9)에 있습니다. 그 말은 십계명은 지킬 필요가 없다는 말입니다. 이해가 되고 안 되고를 떠나, "아멘, 믿습니다"만 반복하면 구원이 있습니다. 그래서 신도들이 목사 설교 중에 그 소리를 크게 지르나 봅니다. 우리의 생각, 말, 행위 모두가 업(業)이 되어 다시 태어나서라도 기필코 갚지 않으면 안 된다는 가르침이 있습니다. 우리의 고통의 원인이 그것 때문이라고..
우리의 믿음은 왜곡되어 있다. 그것이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이유다. 우리는 믿음이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끼는 것만 말하라. 깨달음은 보이는 것, 들리는 것, 느끼는 그 자리에 있다. 허심(虛心)만이 깨달음의 왕도이다.
믿음을 갖는다는 것은 좋은 일이다. 믿음은 우리를 긍정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믿음은 삶의 목적을 알게 하고, 그것은 기쁨과 감사로 이어지고, 더욱 대단한 일은 사후에 대한 불안까지도 해소한다. 하지만 사람들이 실수하고 있는 것은 무언가를 믿기에 앞서, 믿는 주체(主體), 즉 자기 자신에 대한 파악을 전혀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믿음이란 "믿음의 대상"과 "믿는 자" 간에 이루어지는 일이다. 그러므로 믿음을 갖기에 앞서 그 둘에 대해 면밀한 관찰이 선결되어야 한다. 둘 중의 하나가 부실하면, 나머지도 당연히 부실을 면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선 살펴야 하는 것은 당연히 '믿는 자'여야 한다. 왜냐하면 神, 道, 自然 등 믿음의 대상은 자신에 대해 무지(無知)하고는 접근조차 불가능한 것이기 때문이다. 자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