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08)
谷神不死
1991년 감신대 변선환 학장은 ‘기독교 밖에도 구원이 있다’며 ‘기독교인이 아니라도 구원받을 수 있다’고 말한 이유로 학장은 물론 목사직에서도 면직됐다. 그의 제자인 이현주 목사는 그가 ‘기독교 안에도 구원이 있다’라고 말하지 않은 것이 실수였다고 의미있는 말을 했다. 우리 주변에서 그런 일은 자주 일어난다. 그런 일은 기독교 뿐 만이 이니라 의외로 불교를 신앙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흔히 일어난다. 특히 불교인이 아니라고 생각되는 사람이 불교에 대해 언급을 하면 심히 불쾌해 한다. 그리고 기독교인들과 다름없이 배타적(공격적)인 사람이 적지 않다. 칼라마경에 나오는 부처의 가르침을 같이 읽어보자. "세존이시여, 어떤 사문(沙門) · 바라문들이 있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주장은 설명하고 드러나게..
알아차림을 "알아차리는 자"가 있다. 그것을 "인식(認識)의 주체(主體)"라 한다. 하지만 그것은 드러나지 않는다. 그것은 알아차림 속에 가려져 있기 때문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단지 알아차리기만 하라.그것이 인식의 주체이다. 알아차림 속에 인식의 주체도 함께 있으니 말이다.
분별하고 있는 내가 있고, 분별하는 나를 지켜보는 놈이 있다. 분별은 번뇌(煩惱)를 부르지만, 지켜보는 놈은 순수함 자체로 있다. 오매일여(寤寐一如)란, 번뇌가 사라진 상태가 언제나 있음을 말한다. 동산(東山)이 물 위를 가는 것을 알아차리고, 남풍(南風)이 불고, 전각(殿閣) 밑이 서늘함을 알아차리는 놈에겐, 산란과 갈등이 없다. 자나 깨나 화두(話頭)가 들린다는 것은, 지켜보는 놈이 살아있음을 알아차리고 있다는 것이다. 화두란 의미를 챙기는 것이 아니라, 분별하는 놈을 알아채고 있는지를 묻는 것이다. 이뭣고?!
불교의 핵심을 말하자면, '나라고 할만한 것은 없다', 즉 무아(無我)이다. 그것이 싯다르타 깨달음의 정수이기 때문이다. 반면에 바라문교(힌두교)는 유신론이다. 창조, 유지, 파괴를 담당하는 삼주신(Trimurty로서 Brahma, Vishunu, Shiva)을 신앙하며, 개체적 자아인 Atman이 우주의 궁극적 실재인 Brahman과 합해지는 것을 최종적 희망으로 생각한다. 그 신앙 체계를 뒤엎은 것이 불교이다. 불교의 교리 체계는 거의가 無我를 증명하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대승(大乘)이 출현하며 힌두의 윤회까지 받아들이더니, 無我가 진아(眞我)라는 해괴한 믿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부처의 가르침인 無我를 부정할 수는 없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
외부의 것, 즉 소유와 지위를 통해 자기 존재감을 나타내려 하는 사람이 있다. 하지만 그것은 늘 불안하다. 그것들은 무상(無常)하며, '나'와는 유리(遊離)되어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소유하지 않아도, 차지하지 않아도, 늘 나와 함께 있으며,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나 자신'이다. 우리가 불행해지는 것은 관심을 외부로만 돌리기 때문이다. 가지지 않아도 나는 존재하지만, 내가 유명무실하다면 소유나 지위는 아무 소용이 없다. 잊지 말아야 하는 것은 언제나 나는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그것은 늘지도, 줄지도 않으며, 때 묻지도, 깨끗하지도 않다. 그것이 어디서 비롯됐는지는 지금 당장은 몰라도 된다. 중요한 것은 그것이 지금 여기 이렇게 있다는 것이다.
나, 즉 "자아(自我)라는 것이 실재하느냐"는 질문에, 싯다르타는 무기(無記)를 택했다고 한다. 그리고 이어진 "자아(에고; ego)는 없느냐"는 질문에도, 역시 무기 했다고 불경(佛經)은 전한다. 참고로, '무기'란 가부(可否)를 말하지 않고 침묵했다는 뜻이다. 좀 답답하겠지만, 자아(에고)란 것은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은 중도적(中道的) 성질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선문(禪門)에서는 있다고 해도 30방(榜), 없다고 해도 30방(榜)을 주었었다. 나는 에고(自我)의 실재(實在)를 주장한다. 그리고 주장하는 그것 자체가 '에고'이다. 과거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았을 수 있고, 미래에 에고가 실재하지 않을 수도 있으나, 현재를 사는 우리에게 에고는 엄연(儼然)하다. 에고는 바로 '나'이기 때문이다. 자..
싯다르타의 출가 목적은 어디까지나 생로병사의 해결이었다. 그는 오랜 고행 끝에 그 실마리를 풀었는데, 그것은 무아(無我)였고, 열반(涅槃), 즉 적멸(寂滅)이었다. 그것으로 그는 부처의 위에 오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중생(衆生)에게 밝히는 것을 꺼렸는데, 그 이유는 그것을 이해하고 반길 중생은 없다는 것이었고, 부득이 꿩 대신 닭 격인 고(苦)의 해결책, 즉 사성제와 팔정도를 내어놓았다. 하지만 그것은 그에게 만족스럽지 않았으며, 궁극적인 깨우침과도 거리가 멀었다. 해결해야 할 것은 苦의 당체인 자아에 대한 깨우침이었으며, 결국 그는 원인무효를 시키는 방편, 즉 無我를 주장함으로써 일단 문제를 봉합했다. 그라나 그것이 신박한 해결책이긴 했지만, 너무 비관적인 풀이라 대중의 문제해결책으론 많이..
귀신 중엔 인간에게 복(福)과 화(禍)를 주는 능력이 있는 귀신도 있습니다. 그들은 재물, 권력, 명예로 인간을 지배하려 합니다. 그래서 재벌이나 대통령도 그들 앞에 엎드립니다. 하지만 색(色)과 공(空)이 하나라는 것을 깨우친 수행자는 그들이 두렵지 않습니다. 재물을 뺏어가고, 일을 그릇되게 만들고, 사람을 흩을 수는 있어도, 바른 수행자의 생명은 가져가지 못합니다. 수행자는 모름지기 재물, 권력, 명예를 초개(草芥)와 같이 여겨야 합니다. 그런 수행자가 되어야 합니다. 귀신들도 무서워하는 그런 수행자 말입니다.
상위인지(Metacognition)를 개발하기 위해선 늘 깨어있는 연습을 해야 한다. 알아야 할 것은 우리에겐 두 벌의 오감(五感)이 있다는 것이다. 한 벌은 안이비설신(眼耳鼻舌身)의 육체적 오감이요, 다른 한 벌은 정신적 오감이다. 눈을 감아도 보이고, 기억을 살리면 들리고, 냄새나고, 맛이 나고, 감각을 일으키는 것, 그것이 정신적 오감이다. 정신적 오감을 개발하면 상위인지(上位認知) 기능은 동시에 살아난다. 그 중 특히 정신적 시각(視覺), 즉 시각화(Visualization) 연습이 중요하다. 그것은 초능력으로도 이어지기 때문이다. 나이 들어 멀거니 TV 시청하는 시간이 많을수록 해마는 힘을 잃고, 인지력(認知力)은 퇴화한다. 해마의 퇴화는 치매(癡呆) 증세로까지 발전한다. 해마의 퇴화를 방지하려..
선도(仙道)를 닦는 중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는 선도를 닦아 ‘아나함과’를 얻었다고 하며 여러 가지 신통(神通)을 부렸다고 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에 대한 이야기가 모두 불에 타 없어졌답니다. 능엄경 주석집을 써서 자기가 살던 집 천장에 숨겼는데, 불이 나서 소실되었다고 합니다. 불나기 전 누군가가 그것을 베껴 두었다는 말은 있지만 말입니다. 우리는 행적을 보고 누군가를 판단합니다. 공부를 제대로 한 사람에게는 비밀이 없습니다. 물어보는 사람이 있으면 아는 것 모두를 서슴없이 공개하는 법입니다. 변죽만 울리고 공개를 미루는 것은 뱀 장사가 하는 짓입니다. 그분의 말씀 중에 ‘마음을 항복 받으라’는 말이 있습니다. 마음을 항복 받는다는 의미가 무엇인지 직접 듣지 못해 섭섭합니다. 저의 개인 소견으로는 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