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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작물(作物)을 재배하려면, 먼저 땅을 잘 고른 후, 밑거름을 넉넉히 한 후에 심어야 한다. 무턱대고 심어놓기만 한다고 소출(所出)이 나오는 것은 아니다. 심은 후에는 물 주기와 추비(追肥) 주는 것도 잊어선 안되는데 선도(仙道) 공부도 마찬가지다. 적절한 운동을 통해 근육을 고르고, 특히 골반과 척추를 반듯하게 조정해야 한다. 외단공(外丹功)이 효과적이다. 몸을 먼저 고른 후, 호흡 수련을 시작해야 하는데, 그것을 조신(調身), 조식(調息)이라 한다. 수련은 하다 말다 띄엄띄엄해서는 안 된다. 수련은 마치 물을 끓이는 것과 같아서 가열(加熱)을 멈추면 물은 식게 마련이다. 하루도 쉬지 않는 몸 고르기와 마음을 단전(意守丹田)에 두는 것이 수련의 핵심이다.
아들 녀석은 K9 포대에서 병역의무를 마쳤다. 연평도 사건 때, 국군의 K9이 문제가 있어 즉시 응사(應射)를 못 했다는 소리를 듣고는 자기로선 이해가 안 되는 일이라고 했다. 포병(砲兵)이란 하루의 대부분을 언제든 포(砲)를 최선의 상태로 정비하는 일이거늘, 격발(擊發)이 안되었다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했다. 요즘은 포(砲)가 부실해 중도에 시동이 꺼지는 젊은이도 있다지만, 그것은 포에 문제라기보다 정신적 문제라고 나는 본다. 남자의 자존심은 뭐니 뭐니해도 포의 상태, 즉 발기력에 있다. 말 안 해도 알겠지만, 일시적 발기력을 넘어서 일정 시간 유지되어야 진짜다. 겨우 50밖에 안 된 남자가 자기 정력을 자랑해 댄다면 그것은 팔불출에 속한다. 이제는 나이 20 정도는 깎고 카운팅해야 하기 때문이다. ..
선도(仙道)는 '깨달음(見性)'을 말하지 않는다. 단지 '단전(丹田)만을 지키라(意守丹田)'고 한다. 선도는 '지관(止觀)'을 이야기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 과정들이 止(사마타)로 시작해 觀(위빠사나)으로 끝난다는 것을 이해하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지 않는다. 몰입(沒入)을 이야기하지는 않지만, 단전에 마음을 두는 것만으로 힘쓰지 않고 내면세계에 몰입(三昧)한다. 특별한 자세(정좌)를 요구하지는 않는다. 기를 일으켜 몸을 다스리는(調身) 일련의 동작들이 있으며, 숨을 조율하는 법(調息)이 있고, 기의 흐름을 관조하는 것으로 마음이 안정(調心)을 찾는다. 사실상 그것들 모두는 한통속으로, 우리를 해맑고 고요한 자리(空寂)로 인도한다. 선도는 세인(世人)들에게 건강 장수법 내지는 신통력 개발법으로 알려졌지만..
인간은 존재(存在)에 대해서만 알 수 있다. 비존재, 즉 없는 것에 대해선 알 수가 없다. 우리 인간은 있는 것에 대해 생각하며, 그 생각을 발전시켜 세계관을 만든다. '있음'이 없이 우리는 무엇도 생각할 수 없고, 어떤 일도 할 수가 없다. 인간이 생각할 수 있는 가장 근원적(根源的)인 것은 '존재'이다. 있는 것을 있음의 차원에서 주목하는 사람을 가리켜 '존재자'라 부른다. 세상만사는 있음으로만 존재한다. 없는 존재자는 세상에 없다. 존재를 전제로 해야만이 존재자가 되기 때문이다. 존재란 변화하고 있는 것의 근저(根底)에 있으면서 자체적 변화는 겪지 않는다. 그것을 우리는 실체(實體)라 부르며, 그것은 다른 있는 것들보다 먼저 있는데 그것을 가리켜 제1 원인이라 부른다. 무아(無我)란 가상(假像)이다..
가르침은 간단명료해야 한다. 본인의 지식 자랑은 가르침이 아니다. 견성(見性) 가르침도 마찬가지다. 바르게 깨우친 사람은 쉽게 이치를 설명하고, 난해한 것은 비유로 대신한다. 계율(戒律)과 고행은 필요 없다. 자기를 밝히는 것뿐인데, 무슨 단계가 그리도 많으며, 무엇이 그리도 복잡하단 말인가? 중도 포기를 하는 가장 큰 이유는 애를 써도 오르지 못할 나무라는 판단이 들었기 때문이다. 경전(經典)이나 어록(語錄)은 깨우침을 얻은 후에 읽어도 된다. 얕은 인식으로 견문만을 넓히다가는 시간이 지날수록 바른 깨달음에서 멀어진다. 선도(仙道)는 승강개합의수단전(昇降開合意守丹田)이면 끝이다. 그냥 숨을 걸어 힘을 빼고, 올리고 내리고(昇降), 열고 닫고(開合) 움직이면서 丹田에 마음을 두고만 있으면, 저절로 축기(..
직접 하지 않고, 남의 하는 일을 보고 자기가 하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직접 가보지 않고, 사진(영상물)을 보면서 마치 자기가 거기에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직접 해보거나, 들어보거나, 맛보는 대신, 대리만족을 자기 것이라 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식으로 사는 것이 안전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직접 하지 않으면 양이 차지 않는 사람도 있다. 내가 깨닫기보다 깨달은 자 앞에 엎드리기를 좋아하고, 그의 말을 금과옥조(金科玉條)처럼 따르며 사는 많은 사람이 있다. 성경을 직접 보기보다 신부나 목사의 설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 불경을 직접 챙기기보다 승려의 법문으로 대신 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하지만 선도(仙道)는 누가 대신해 줄 수 없다. 그리고 할 말이 그리 많지도 않다. 정기신(精..
의수단전(意守丹田)이란, 마음으로 단전을 지키는 것이다. 마음이 가는 곳으로 氣는 가기(神行即氣行) 때문이다. 단전(丹田)을 깨어내게 하기 위하여 우선은 자연스러운 복식호흡(腹式呼吸)을 연습한다. 20초 호흡(들숨과 날숨의 합)을 확보하는 것이 유리하며, 지식(止息)은 하지 않는다. 생각처럼 어려운 일은 아니다. 통기와 함께 진행하면 누구나 6개월(하루 1시간)이면 가능한 일이다. 복식호흡이 원만해지면 호흡을 하복(下腹)의 중앙부(中央部) 단전으로 보내본다. 관원(關元)이나 기해(氣海)나 회음(會陰)은 단전이 아니다. 그 자리(穴)들은 丹田으로 들어가는 통로일 뿐이다. 자연스럽게 20초 호흡이 되도록 하면 매우 좋다. 그리되면 단전자리가 드러나기 아주 쉽기 때문이다. 丹田이 깨어나 안정적으로 호흡이 된다..
복식호흡은 건강에 유리하다. 내장(大腸, 腎腸, 膀胱 등)에 활기를 줄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복식호흡을 하면서 그것으로 단전호흡(丹田呼吸)이라고 하는 것은 마치 제주와 호남에 비가 1mm 온 것을 가지고 전국적인 해갈(解渴)이 되었다고 하는 것과 같다. 복식호흡과 단전호흡은 전혀 다르다. 복식호흡은 공기를 아랫배로 밀어내려 부풀고 꺼지게 하는 호흡이며, 단전호흡은 단전이 기운(공기가 아님)을 끌어들여 그중에 진기(眞氣)를 축적하는 호흡이다. 단전호흡을 하기 위해서는 우선 잠자고 있는 단전을 깨워내야 하며 그것을 활성화해야 한다. 막연하게 복식호흡을 한다고 단전이 깨어나는 것은 아니며, 활성화되지도 않는다. 그것은 마치 모래로 밥을 짓겠다는 것과 같다. 단전을 활성화하려면 전신의 기맥들이 막힘없이 열..
"선도(仙道)의 맥(脈)은 이미 끊겼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그렇게 말하는 이유는 선도라 할 수 없는 사이비가 선도를 표방하고, 신앙화하여 사리사욕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단체들이 여럿 있다. 산속에 숨어 고요히 앉아있기만 하는 것만이 선도는 아니며, 자랑삼아 초능력을 보이는 것도 선도가 아니다. 단전(丹田)과 소주천(小周天) 이야기가 나오면 두루뭉술하게 비껴가는 자칭 선도인(仙道人)들이 많다. 꼭 알아야 할 것은 단전과 소주천이 빠진 것은 선도가 아니라는 것이다. 입으로는 태식(胎息) 운운하지만, 실제로 그것을 운용하는 사람을 나는 만나본 적이 없다. 생각(意念)으로 미미하게 기(氣)를 느끼면서 그것을 소주천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도 너무 많다. 진정한 선도라면 구체화한 성명쌍수(性命双修)를 ..
도(道)는 보이고 들리지 않지만, 존재의 근본입니다. 에너지 역시 시작이 언제인지 오는 곳이 어디인지는 알 수 없지만, 존재를 있게 하고 유지하는 작용(作用)의 주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없습니다. 불도(佛道)는 깨달음, 즉 마음자리를 알아채는 것을 공부의 주체로 생각하지만, 선도(仙道)는 깨달음과 에너지(氣) 공부를 동시에 하는(性命双修) 융통성이 있습니다. 佛道에는 깨달음 얻음이 모든 것이므로 에너지는 무시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지만, 仙道는 깨달음을 얻었다 할지라도 에너지 없이는 아무 의미가 없다고 가르칩니다. 이발기수(理發氣隨)든, 기발이승(氣發理乘)이든, 理와 氣가 하나(理氣一元論)라는 것은 분명하며, 그런 맥락에서 선불합종(仙佛合宗) 역시 의미가 있습니다. 仙道를 통해 연기화신(鍊氣化神)..