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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예수는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도록 간단하게 이야기한다. 그것이 많은 지식인이 예수를 따르는 이유다. 예수처럼 '해탈(자유)'을 쉽게 이야기한 사람은 없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그리고 진리에 대해서도 내가 바로 진리라고 했다. 내 안에 모든 것이 있기 때문이다.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요한 14:6)
큰돈을 벌고 싶은 사람은 그것으로 할 뚜렷한 좋은 일이 있어야 한다. 지니고만 있는 돈은 내 돈이 아니다. 돈은 쓸 때 비로소 내 돈이 되는 것이다. 막연하게, "돈이 많이 있으면 좋지!", "그것으로 무엇을 할지는 돈을 벌고 나서 생각해도 돼"라는 생각하는 사람에게 큰돈은 오지 않는다. 그런 사람은 돈의 노예가 되어, 벌어도 벌어도 더 벌어야 하는 강박감 속에 산다. 그는 늘 이것저것에 쫄리면서 산다. 목적이 돈이기 때문이다. 인색하게 살면 늙어 집 한 채는 지니고 살 수 있다. 하지만 죽도록 가난은 그의 친구다. 돈은 벌릴 때가 있고 나갈 때가 있는데, 그것을 알면 편안하다. 수중에 필요한 돈이 어느 정도만 있다면, 늘 베푸는 마음이어야 한다. 그런 태도가 돈을 부른다. 돈이 한창 벌릴 때는 돈 쓸 ..
진정으로 수행(修行)을 성공시키려면 'My way'여야 한다. 남의 눈이 두려운 사람, 이 눈치 저 눈치를 보는 사람은 필패(必敗)한다. 그것은 깨달음을 이나 소주천(小周天)을 위해서나 마찬가지다.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은 세상에 없다. 그들은 나를 걱정하는 척하지만, 그들 역시 관심은 그들 자신에게만 있다. 자기를 Open할 수 있는 사람만 깨닫는다. "와서 보라. 나는 무엇도 숨기지 않는다." 깨달음의 대표 격인 싯다르타의 말이다. 우리는 제도에 묶여 살고 있다. 교육은 힘 있는 자들이 사람들을 자기 부리기 위해 하는 것이다. 과감히 그것들로부터 자유(自由)를 선언하지 않는 한, 무엇도 될 수 없다. 신선(神仙)이란 말처럼 자유로움을 잘 표현한 말도 없다. 내가 옳다고 한다면 그 길을 가라. 좌고..
한국의 민주주의는 피로 지켜왔지만, 어느덧 자본이 지배하는 못된 사회가 되어버렸다. 국민적 인기를 끌어 검찰총장에 올랐던 그는 그 여세를 모아 대통령이 된 직후 자유의 깃발을 달았었다. 하지만 그 자유는 기득권 일부의 자유에 국한되었으며, 결국은 가치와 사상 중심으로 말을 갈아탔다. 그가 말했던 자유는 이미 국민들의 뇌리에서 사라졌으며, 우리는 미국과 일본을 등에 업은 일당 파쇼를 두려워한다. 그는 야당과도 국민과도 대화하지 않으며, 그의 입맛대로 국정을 밀고 나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과거 정권, 언론을 재갈 먹였던 사람을 문체부 장관으로, 거침없이 호전적인 장군을 국방부 장관에 앉힌 것을 보면 우리는 그의 정치적 야망을 짐작한다. 파시즘(Fascism)의 슬로건은 '믿어라', '복종하라',..
단전(丹田)이 열린 사람은 외롭거나 우울할 사이가 없다. 단전을 싸고도는 기운이 행복의 호르몬을 선사해 주기 때문이다. 단전이 열린 사람은 부러운 것이 없다. 단전이 열리면 세상을 보는 가치 기준이 바뀌기 때문이다. 그는 무상(無常)함 속에서 영원을 보며 산다. 모든 것은 흘러 지나가지만, 세세토록 변치 않는 '그것'을 얻어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단전이 열리지 않은 사람은 단전에 보다 더 많은 시간을 다른 일들에 소비하고 있다. 그것은 지속적인 불만을 주고, 그것이 괴로움이 된다. 마음을 하루 1시간 만이라도 단전에 고정할 수 있다면, 당신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다. 자유와 평화 속에 늘 있게 된다.
솔직하게 말하고 행동하자. 그럴 수 있는 힘을 기르자. 자신감이 있는 사람만이 솔직할 수 있다. 깨닫지 못하는 이유는 자기에게도 솔직할 용기가 없기 때문이다. 내가 나를 보는데 왜 남의 눈이 필요한가? 무엇이 두려운가? 자기 자신에게만이라도 솔직해지자. A를 A라고 말하고, B를 C라고 말하지 말자. 과감히 벗어나 보자. 배고프면 배고프다 하고, 졸리면 졸립다고 말하자. 주입받은 모든 것에서 벗어나자. 가식을 모두 벗어버리자. 세상의 생각은 세상의 생각이고, 순간순간 아닌 건 아니라는 것을 알아채는 순간, 당신은 깨어난다. 그리되는 순간, 한 번도 만나보지 못한 진짜 자기를 만나게 된다. 자유를 알게 된다.
인간은 누구나 자유를 갈구한다. 자유 도덕 행위자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있는 그대로 자유롭다. 무엇에도 의지할 필요가 없다. 스스로 무위자연(無爲自然)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숭배와 복종은 인간다운 일이 아니다. 인간은 스스로 숭배하고, 스스로에게 복종하도록 구조되어 있기 때문이다. 숭배와 복종은 사이비(似而非)들이 장삿속으로 요구하는 일이다. 그것에 맥없이 응하는 것은 스스로 자기가 누군지를 모르고 살기 때문이다. 숭배와 복종에 순치(馴致)되는 것은 스스로의 존엄(尊嚴)을 포기하는 어리석은 일이다. 개개인은 유아독존(唯我獨尊)의 존재이다. 무엇에도, 신(神)이나 부처라 할지라도, 그것에 예속되어서는 안 된다.
사후의 세계를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고 그 소리를 마음에 담아 믿고 사는 사람도 있다. 사후를 주장하는 그 사람이 정말 죽음을 알고 있는지는 생각해 보지도 않고 말이다. 죽음 뒤 이야기는 누군가 꾸며낸 이야기를 각색하는 것이다. 열반(涅槃)을 위하여 수행하는 사람들이 있다. 죽어서 지옥을 피하기 위해 공덕을 쌓는 사람들도 있다. 그런 사람들은 꿈을 좇고 있을 뿐, 자기가 누군지 그 당체(當體)에는 관심이 없다. 그것, '주인공'을 찾아야 한다. 바로 그것이 우리를 행복하게 해줄 실재(Reality)요, 그것이야말로 세상의 끄달림들을 벗어나게 하고, 당장 극락으로 우리를 인도하는 주체(主體)이니 말이다.
인간은 누구나 더 나아지기를 원합니다. 하지만 게으른 자는 불안한 변함보다는 일없는 안정을 더 선호합니다. 누구나 마음만 바꾸면 자기를 더 낫게 바꿀 수 있건만, 하지만 마음은 바꾸려 하지 않고, 바꾸지 않을 핑곗거리만을 생각합니다. 불안해서 진취적이 되지 못하는 것이 아닙니다. 진취적이 못 되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사람이 불안해서 자기를 바꾸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를 바꾸지 않기 때문에 불안한 것입니다. 변하세요, 고정관념에서 나오세요. 거기에 자유가 기다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