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08)
谷神不死
구원이란 고통과 죄악으로부터 건져지는 것, 그것의 결과로 영생을 얻는다. 믿음이 없이는 구원도 없지만, 그렇다고 "믿습니다" 라는 말을 반복한다고 구원이 있는 것은 아니다. 반드시 행위가 따라야 한다. 성경도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다(야고보 2:26)'라고 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자기를 알아야 진정한 구원이 있다. 구원받을 대상자가 바로 '자기'이기 때문이다. 자기가 누구란 걸 알려면 수행해야 한다. 그것은 누구에게 배워 들어서 아는 것이 아니다. 얻어 들은 자기는 자기가 아니니 말이다. 자기를 알려면 깨달아야 한다. 깨달아야만이 제대로된 자기를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교리를 이해하게 된 것을 깨달음이라 하는 교파가 있지만 그것은 온전한 깨달음이 아니라고 믿는다. 깨달음은 지식에서 얻는 것이 ..
수행이란 스스로의 힘으로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타력 수행이란 말은 적합하지 않다. 이성을 가져야만 가능한 것이 자력 수행이다. 그것은 마치 밥 먹는 것과 같다. 언제까지나 억지로 밥을 떠먹일 수는 없기 때문이다. 타력 수행이라면 그것은 신앙을 가리킨다. 그러므로 신앙을 가진자는 깨달을 수 없다. 타의에 의해 목표가 이미 정해진 것이 신앙이기 때문이다. 신앙에 빠지려면 눈을 멀게 해야 한다. 합리적인 사고를 가지면 신앙에서 벗어나게 된다. 맹신자가 아니면 신앙에 빠질 수 없다. 자력 수행에서 바라볼 대상은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하지만 자력 수행이라도 처음엔 스승의 도움이 필요할 수 있다. 하지만 언제까지나 도움을 기대할 수는 없다. 너무 어릴 때는 떠먹여 줄 수 있다. 하지만 아기들도 곧 스스로 먹겠다..
지식(知識)을 자랑하는 사람들이 있다. 책 많이 읽은 것으로 우쭐하는 사람들 말이다. 특히 신앙에 매몰되어 교리를 금과옥조로 따라는 사람일수록 과대망상(誇大妄想)이 강하다. 대체로 크게 깨달은 사람일수록 학벌이 약하고, 읽은 것이 적은 사람이다. 혜능(慧能)이 말했다는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은 그 초점이 선(善)이나 악(惡)에 있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지 말라는 것에 있다. 깨달음을 구하려면 무념무상(無念無想), 즉 일체의 상념을 없이 해야 한다. 그리하려면 머릿속에 든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불리하다. 내가 신앙(信仰)을 가진자는 깨닫기가 어렵다고 한 것은 신앙인은 자기의 신앙을 고수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자기 신앙을 추앙하지 않는 사람은 신앙인이 아니다. '불사선(不思善) 불사악(不思惡)'..
(하루에 두 시간을 면벽(面壁) 수련을 하는 사람이 있었다. 다음은 그 사람과의 대화이다) ‘당신은 지금 무엇을 위해 벽 앞에 앉아 계신가요?’ ‘깨닫기 위해서지요.’ ‘그렇게 앉아있으면 벽에서 깨달음이 나오나요?’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이렇게 하고 있노라면 깨닫게 된다고 믿습니다.’ ‘무슨 깨달음인가요?’ ‘내가 누군지 알게 되는 거지요.’ ‘(놀라며) 당신은 자기가 누군지 모르나요?’ ‘아! 알긴 하지만 참나(眞我)를 모르기 때문입니다.’ ‘참나는 무엇입니까?’ ‘그것을 찾기 위해 이렇게 수련하고 있는 겁니다.’ ‘잃어버렸나요?’ ‘모르겠습니다.’ ‘제가 찾게 해드릴까요?’ ‘정말요?’ ‘여기 이렇게 있지 않습니까?’ ‘네에??’ ‘일단 눈은 뜨고 저를 보세요. 제가 보이나요?’ ‘네, 보입니다...
무명(無明)은 불교의 교리, 십이연기(十二緣起)의 첫째이며 그것만 해결하면 생로병사는 자연히 해결된다. 하지만 무명은 불교의 전유물이 아니며, 불교 종사자만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불교는 무명을 미혹된 존재가 겪는 괴로움[苦]의 근본으로 이야기하며, 추구하는 대상에 대한 채워지지 않은 불만족(不滿足)의 모습으로 나타나기 때문에 갈애(渴愛), 즉 탐욕(貪欲) 또는 집착(執著, 執着)과 표리의 관계를 이루는 것이라 말한다. 붓다는 무명(無明)이란, 근(根) · 경(境) · 식(識)의 화합이 일어날 때 이전까지 쌓은 염오(染污)한 업(業)으로 인해 해당 경(境)에 대한 부정사유(不正思惟, 邪思惟: 바르지 않은 사유, 바르지 않은 생각, 8 정도의 정사유의 반대가 일어나며, 이 부정사유로 인해 치(癡)..
역사는 다툼의 연속입니다. 그것이 발전을 불러왔습니다. 훌륭한 성리학(性理學)조차도 피를 부르는 다툼이었습니다. 종교가 많아진 이유는 사람들의 시각이 다르기 때문입니다. 일원론과 이원론을 가지고 다툼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은 일입니다. 어떤 시각이냐에 따라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달에서 지구를 본다면, 지구에 있는 것들은 모두 하나로 보입니다. 산도 강도, 사람도 개도, 선과 악도, 모두 하나로 뭉치고 맙니다. 부정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사는 이 지구에는 善惡, 南北, 東西가 갈리고, 빈부, 여당-야당, 불교와 기독교가 구별됩니다. 그것이 공부가 덜 되어서 그런 것일까요? 그 모두가 하나라고 주장하는 사람을 보았습니다. 하지만 그 역시 모래로 밥을 지어 먹지는 않으며, 소와 돼지..
'무아(無我)'를 믿고 있다면, 세상 살아가기가 아주 곤란할 것이다. 일단 자기가 가진 모든 소유를 자기가 있다고 하는 사람에게 양도해야 한다. 그래야 정말로 '나 없음'이 증명될 것이니 말이다. 재물과 권력, 명예 정도를 양도하기는 쉬울 것이다. 하지만 몸과 마음, 그리고 자기주장과 믿음까지 모두 포기할 수 있을까? 어려운 일이다. 거기에 내가 숨 쉬며 살아있기 때문에... 주장을 할 때도 거기엔 '내'가 있다. 배가 고프면 배고픈 걸 알고, 졸리면 졸린 줄 알고, 죽비 소리에 깜짝 놀라는 바로 '그놈' 말이다. 이른바 '참나', 즉 진아(眞我)라 부르는 그놈, 우리가 깨닫기가 어려운 이유는 없는 그것을 찾으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언제나 나와 함께 있으며, 생긴 적도 없었고, 사라지지도 않는 ..
Q: 자신감이란 무엇입니까? A: 자신감이란, '스스로 할 수 있다고 믿는 마음'입니다. 자신감은 누구에게나 있지만, 갖고 싶다고 가져지는 것이 아닙니다. 자신감은 남이 만들어주지 않습니다. 스스로 기르는 것이 자신감입니다. Q: 자신감은 집중력과 어떤 관계를 갖습니까? A: 집중력이 없으면 자신감이 없고, 자신감이 없는 사람에게는 집중력도 없습니다. 자신감은 내부 의식, 즉 잠재의식과 관계있습니다. 그러므로 잠재의식과 소통을 해야 자신감을 얻을 수 있습니다. Q: 자신감은 체력과 무슨 관계인가요? A: 자신감을 위해 먼저 필요한 것은 체력입니다. 질병이 있거나, 체력이 약하면 누구라도 위축되기 마련이고, 그런 사람에게 자신감은 없습니다. Q: 자신감을 위해 필요한 것들은 무엇입니까? A: 먼저..
스승은 스타팅 모터와 같다. 그가 당신에게 에너지를 줄 때 스타팅 모터는 돌아간다. 스타팅 모터가 돌아가는 동안 엔진 시동이 걸려야 한다. 그때 탱크에 기름이 있어야 한다. 기름이 충분하다면 엔진은 계속 제 일을 할 것이다. 스승 옆에 있을 땐 깨달은 것 같다가, 집에 온 다음 날 바로 속인(俗人)으로 돌아가는 이유는 무엇인가? 엔진 시동이 걸리지 않았기 때문이다. 마음(머리)으로 깨닫는 것은 부족한 깨달음이다. 몸으로 깨달아야 진정한 깨달음이다. 몸과 마음을 동시에 닦는 공부가 아니라면.. 그런 깨달음은 불안하다. 세상 속에서 깨달아 있어야 한다. 좋을 때나 슬플 때, 성공을 거두었을 때나 실패했을 때, 언제나 깨달음이 여여(如如)하지 못하다면 어찌 그것을 깨달음이라 하겠는가? 에너지(氣)를 마음에 대..
스나이퍼가 일을 할 때는 가급적 장애물 없이 타켓을 정확히 볼 수 있는 곳에 자리해야 한다. 깨달음(見性)을 구하는 사람도 마찬가지다. 깨달았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의 말을 들으면, 각자의 입장에서 설명을 진행하고 있으므로, 헷갈리다가 잘못되면 엉뚱한 곳으로 빠져들기 십상이다. 깨달아야 할 것은 한둘이 아니지만, 그 모든 것이 키워드 하나만 확실하면 연쇄해서 하나하나 풀린다. 1700 공안(公案) 중 하나가 열리면, 나머지가 모두 열린다는 말은 그런 뜻이다. 단연 공안의 대표는 "이뭣고", "나는 누구인가"일 수밖에 없다. 무아(無我)니, 연기 중도니, 열반이니, 하는 4차원적인 말들은 나중에 살펴도 된다. "나"라고 일컬어지는 것 중 무상(無常)한 것, 시공(時空)에 묶여있는 것들부터 하나하나 제하여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