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록달과 손가락 (508)
谷神不死
인도철학계열의 신앙의 주축은 어찌하든 이번 생에 깨달음을 얻어 윤회(輪廻)에서 벗어나는 것이 테마(Theme)이다. 그 점에 있어서는 '싯다르타'도 동일하다. 그의 가르침대로 세속을 떠나 수행하여 깨우침을 얻으면 고통스러운 이 세상에 다시는 태어나지 않고 영원한 안식을 얻는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아무리 생각을 해도 다시 생각해야 할 것 같다. 우선 깨달음이란 무엇인가부터 알아보자. 그들의 주장을 빌면, 깨닫고 나니 무아(無我), 즉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어디에도 없었다는 것이다. 즉 오온(五蘊 : 色受想行識)이 공(空)했더란 것인데, 그것을 그들은 니르바나(Nirvana), 즉 열반(涅槃)이라 하여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으로 치부(置簿)한다. 그렇다면... 여태 미친 짓을 한 것이 아닌가? 수..
호텔 앞 공원 벤치에 거지가 살고 있었다. 하루는 공원을 산책하던 호텔 사장이 몸은 지저분하고 추워 보이는 그를 보고 측은심이 발동하여 그에게 방을 하나 주고 거기에서 살게 하였다. 거지 입장에선 졸지에 팔자를 고친 격이 되었다. 그렇게 호텔서 며칠을 보낸 거지는 다시 공원으로 거주지를 옮겨 벤치에 누웠다. 그를 찾은 호텔 사장은 물었다. “호텔서 누가 눈치 주던가요? 왜 편안한 호텔을 두고 다시 여기로 왔나요?” 거지가 답했다. “여기선 보통 때는 거지지만, 잠만 들면 왕도 되고 부자도 되었었는데, 호텔로 옮기고 나서는 잠만 들면 다시 거지가 됩디다. 며칠을 그리 지내니 견딜 수가 있어야지요.” 당신이라면 어느 쪽을 택할 것인가? 잠자는 시간과 깨어있는 시간이 반반이라면 말이다. 한시바삐 잠에서 깨어나..
도심(道心)을 묻는 제자에게 스승은 ‘배고프면 먹고 졸리면 자는 것’이라고 했다. 참으로 당연한 이야기로 들린다. 우리는 누구나 배고프니 먹고, 졸리니까 잔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다. 일상적으로 그리하고 사는 사람이 있다면 솔직하고 진지하게 그로부터 가르침을 구해야 한다. 한번 생각해보자. 과연 나는 배고프니 먹고 졸리니까 자는가? 습관적으로 먹고 습관적으로 자지는 않는가? 시간에 맞추어 세끼 먹어야 된다고 생각하고 최소 7시간은 자야한다고 생각하지는 않는가? 혹시라도 정말 배고프니 먹고 졸릴 때 자면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날까? 더도 말고 열흘만 해보라. 배 더부룩, 소화불량, 설사, 변비 등이 사라지고, 혹시 불면증으로 고생했다면 그것도 깨끗이 사라질 것이다. 위가 준..
주위의 사람들과 여분의 것들을 나누라. 우리에게 나누는 마음만 있다면 우리 모두는 부족함을 느끼지 않으며 행복하게 살 수 있다. 우리는 베풀 수 있는 한 계속 베풀어야 한다. 인구가 얼마로 늘어나던 이 우주에는 물자가 부족하지 않다. 물자는 쉼 없이 새로 생성되기 때문이다 우리가 부족함을 느끼는 이유는 서로 나누지 않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물자가 한정되어 있다고 생각한다. 심지어 알만큼 안다는 사람도 누군가가 소유하면 나머지에게는 결핍이 온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것은 오해이다. 이 우주에는 우리에게 필요한 에너지가 무한으로 있다. 단지 그것을 지혜롭게 사용하지 못하는 것이 슬플 뿐이다. 식량을 예로 든다면 우리는 전 세계 사람이 굶주리지 않고 먹을 만큼 충분히 생산한다. 한국 뿐 아니라 전 세계적으로 ..
‘깨어있음’이란 ‘순수한 나’를 느끼고 있는 것이다. 일을 하고 있든, 게임을 하든, 영화를 보든, 꿈을 꾸고 있든... ‘나’를 느끼고 있다면 그것은 깨어있는 것이다. 순수한 ‘나’는 고요하다. 후회나 불안감이 없으며 늘 편안하다. 길을 걸을 때는 그저 목적지를 향해 걸어야 한다. 생각 속에 빠져 걷는다면 그는 잠들어 있는 것이다. 대화를 할 때 자신의 생각에 빠져 상대의 얘기가 들리지 않으면 그는 잠든 것이다. 욕망이 많은 사람은 생각 때문에 세상을 제대로 볼 수 없다. 잠들어 있기 때문이다. 건강하려면 생각을 쉬는 습관을 들여야 한다. 생각은 에너지 소모율이 너무 높다. 생각은 필요할 때만 사용해야 한다. 그 나머지 시간에는 깨어있어야 한다. ‘깨어있음’은 순수한 인지(Cognition)이다. 나무..
나는 누구인가라는 질문을 받으면 우리는 바로 답을 내기가 쉽지 않다. 그 이유는 첫째, 질문 자체가 막연하고, 둘째, 조금만 깊이 생각해보면 ‘나’란 것엔 이것저것 여러 가지가 덧입혀져 있어서 어느 '나'를 말해야할지 망설여지기 때문이다. 오늘은 ‘진짜 나’에 대하여 생각해보도록 하자. 이것을 너무나 중요한 일이다. 이것을 바로 이해하기만 하면 그때부터 과거에 대한 후회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없이 하루하루를 평화롭게 살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도직입으로 들어가자. ‘나’는 무엇과 합하여 무엇도 될 수 있는 존재일 뿐...홀로는 존재할 수가 없다. 바꾸어 말하면 실재(實在)하는 것이 아니라 조작에 의하여 무엇도 되고 무엇도 안되며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다는 말이다. 예를 들어... ‘잠이 깬 나’,..
‘나’는 무엇인가? 우리는 ‘나’라는 말이 나오면 긴장부터 하는 습관이 있다. 더욱이 ‘무엇인가?’하면 시험 본다는 생각부터 든다. 긴장하지 마라. 세상일은 알면 쉽고 모르면 어렵다. 그리고 쉽다고 생각하면 쉽고, 어렵다 생각하면 어렵다. 도대체 그 어려운 수학, 물리학, 화학, 심지어 양자역학에 까지 관심을 가지면서 왜 가장 소중하고 종일 곁에 있는 ‘나’에 대해서는 무지(無知)하단 말인가? 이유는 익숙하지 않기 때문이다. 과거엔 이성과 친해지는 것이 쉽지 않았다. 심지어 손목한번 잡는데 몇 년이 걸리는 사람도 있었다. 요즘처럼 ‘사귀자’고 말하자마자 포옹부터 하는 용감한 사람은 아주 적었다. 좋은 사람 앞에 서면 벌벌 떨고 식은땀을 흘리는 사람도 있었다. '어렵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를 알아..
우리는 “무언가를 알고 있다”에 속고 있다. 진정으로 우리가 무언가를 알고 있다면 그것을 자신의 말로 설명할 수 있어야 한다. 진정 안다면 초등학생에게라도 설명할 수 있으며 또한 이치적으로 그들의 이해를 구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어떤 주제라 할지라도 그렇다. ‘나’라는 것. 태어난 이래 단 1분도 그것과 떨어져 살아 본적이 없고, 그것이 주체(主體)가 되어 말하고 행동하고, 그것과 함께 울고 웃었으며, 사랑하고 사랑받고 살았는데, 그것이 무엇인가를 말하라는 자리에 바로 말하지 못하고 버벅거리고 있다면 이건 문제도 보통 문제가 아니지 않은가? ‘나’는 무엇인가? 왜 우리는 ‘나’를 설명하라고 하면 자명(自明)하지 못하는가? 그 이유를 생각해 본적이 있는가? 첫째 원인은 그것에 대해 교육받은 적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