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谷神不死
내가 없는데, '내가 없다'는 말은 누가 하는가? 정말로 내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면 '내가 없다'는 말조차 할 수가 없다. 없는 놈이 무슨 말을 한단 말인가? 입으로는 내가 없다고 말하면서 자리다툼하고, 계율 어겨가며 재산 모으고, 축첩하고 노름에 골프치고 다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말이다. 그것도 별 직책을 가지지 않은 승려가 그리한다면 모를까, 최고위 직책을 가진 사람들이 그러고 있다면 그것을 일부가 저지르는 개인적 불찰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내가 있으니 맛있는 것도 찾고, 남의 위에 서려 하고, 여자 구해 자식까지 보려고 하는 거 아닌가? 내가 있어야 나를 깨닫든지 말든지 할 것 아닌가? 없는 '나'가 왜 고(苦)에서 벗어나야 하고 없는 '나'가 왜 깨달아야 한단 말인가? 실로 황당한 일..
나라는 것이 진정 없다면(無我), 무엇이 윤회(輪廻)하는가? 이것에 똑 떨어지는 답을 하는 사람은 없다. 불교 지도자들이 머리를 맞대었지만, 시원한 답은 나오지 못했다. 석가는 제자들에게 윤회에 대해서 재론치 말라고 명령했다고 하는데 의미심장하다. 석가모니 재세 시, 윤회는 민중의 상식이었다. 윤회는 브라만교(힌두교의 전신)의 움직일 수 없는 신앙이기 때문이었다. 한마디로 무아(無我)와 윤회는 모순이다. 알쏭달쏭하게 설명 할 수밖에 없다. 윤회 신봉자들, 그들의 변을 한번 들어보자. * * * * * 세상에 일어나는 모든 일은 연기(緣起)로 이루어진다. 그러므로 우연이면서 동시에 필연이다. 존재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기 때문에 존재하고, 사라진다. 지금 당장은 우리가 알 수 없어도 말이다. 윤회(輪廻)를 ..
말로만 '내가 없다'라고 한다고, 내가 없지는 않습니다. 이 몸과 마음이 있는 한 나는 있습니다. 나에게 욕하는 소리가 개 짖는 소리로 들리고 송곳으로 찔러대도 아픈 줄을 몰라야 내가 없는 것입니다. 내가 없다고 배웠다고 내가 없어지지 않습니다. 죽어 없어지지 않는 한, 나는 여기 이렇게 있습니다. 그것을 알아차리는 것이 깨달음이며 실존입니다. 역설적이지만 말입니다.
우리에게 가장 큰 문제는 죽음입니다. 세상엔 그 문제를 해결한 두 분이 계시고, 그 문제를 해결하는 법이 하나 있습니다. 두 분 중 하나는 예수입니다. 그리고 그에 의해 생겨난 것이 기독교입니다. 그는 말합니다.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무릇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요한복음 11장 25, 26절) 아주 간단합니다. 믿기만 하면 되니 말입니다. 그래서 그는 26절 끝에 말합니다. “이것을 네가 믿느냐?”라고 말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타르타, 즉 부처입니다. 그리고 불교는 그의 깨달음을 바탕으로 생겨난 종교입니다. 그가 깨달은 것은 무엇일까요? 구구한 이야기는 빼겠습니다. 그의 깨달음의 중심은 “나는 없다” 입니다 그가 이룬 깨달음의 핵심 삼법인..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들은 헛수고인줄 뻔히 알면서도 그것에 인생을 바치는 사람들이다. 왜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실패하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안 된다고 결론 내린 것을 혹시나 하며 찾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마치 10년을 사용한 지팡이에서 복숭아가 열리기를 기대하는 것과 같다. "길이 아니면 가지 말고, 말이 아니면 하지 말라"라는 말이 있다. 왜 '진공묘유(眞空妙有)',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니다'라는 말을 만들어냈는지 그 이유를 아는가? 이미 '없다(無我)'고 한 말을 번복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왜 많은 사람들이 싯다르타 앞에 엎드릴까? 그는 자기를 찾은 사람, 무(無)에서 유(有)를 찾아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것을 무상정등정각(無上正等正覺)이라고 한다.
있음이 있지 않으면 없음이 있을 수 없다. 없음이 없이 있음이 있을 수 없듯이 ... 있음은 그저 여여(如如)하건만, 생각 좀 한다는 소수의 사람들이 '없음' 편에 선다. 그들이 주장하는 없음의 논리는, "이것이 있어 저것이 있고, 저것이 있으매 이것도 있듯, 이것과 저것이 서로 의지하여 존재한다"는 이론이다. 결국 그들 주장의 끝은 내(主體)가 없다는 것(無我)인데, 그렇다면 여기 '이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이름 붙이길, '공(空)'이라 하든, '허(虛)'라 하든, 여기 '이놈'이 없으면, 있음도 없음(無我)의 주장 자체도 없을텐데... 자가당착(自家撞着) 아닌가?
사람들이 깨닫지 못하는 이유 가운데 첫째는 "나는 없다"는 전제(前提)를 놓고 시작한다는 것이다. 우리가 무언가를 찾기 위해선 찾을 그 대상이 반드시 존재해야 한다. 그렇게 믿어야 한다. 뭘 좀 안다는 사람들은 앵무새처럼 "때리는 자도, 맞은 자도 없는데 아픔만 있다", 즉 '내가 없다'고 말한다. 그리고 웃기게도 그 말에 생각 없는 많은 사람이 고개들을 끄덕인다. 한마디로 바보 게임, 발가벗은 임금님 놀이이다. 조작된 교리(敎理)에 속지 말라. 뇌를 혼란에 빠뜨리지 말라. 여기 엄연히 이렇게 내가 존재하지 않는가? 물론 이 몸과 마음을 '나'라고 할 수는 없다. 쉼 없이 변하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조금만 주시(注視)에 마음을 쓰면 쉼 없이 변하는 그것(사물)들을 쉼 없이 알아채고 있는 '이것'이 있..
힌두교와 불교(佛敎)는 '나'라고 하는 영구적 실체(實體)가 있느냐 없느냐로 구별이 가능하다. 깨우침을 얻은 싯다르타는 "항상(恒常) 하는 것은 없다(無常)"에 이어, "나라고 하는 실체는 없다(無我)"를 설했으며, 그것은 브라만교를 비롯해 당시 사람들이 믿고 있던 아트만(Atman) 영구불변설(說)을 뒤집어엎는 획기적인 것이었다. '나라는 실체가 없다'면 윤회설(輪迴說)은 단지 설(說)로만 끝나고 말 일이었다. 하지만 싯다르타가 입멸(入滅)한 후, 인도의 거의 모든 불교신자는 다시 브라만교에서 개명(改名)을 한 힌두교로 개종(改宗)하였으며, 불교는 인도 밖으로 옮겨갔다. 성경(the Holy Bible), 특히 구약(舊約)을 보면, "영혼은 죽으며(에스켈 18:4)", "온유한 의인들은 천당이 아니라 ..
깨달은 이에게는 끄달림(苦)이 없다. 그에게는 진실(眞實)이 아닌 것들에 대한 가치가 존중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는 무아(無我)를 말하는데, 여기서 그가 말하는 我는 나와 남, 나와 세상을 분리시키는 에고이다. 그것은 실재(實在)하지 않는다. 그것은 생각에 근거하여 존재하므로, 생각을 내려놓는 순간 사라진다. 진아(眞我)는 오온(五蘊)에 속하지 않으며, 그에게는 자타(自他)가 없다. 그는 그와 세상을 나누지 않으며, 그러므로 그에게는 갈등도 없다. 우리의 고통은 분별심 때문이며, 그것이 만드는 비교하는 마음, 호불호(好不好)가 우리를 불편하게 한다. 깨달은 자는 에고가 허깨비라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에고는 연기(緣起)로만 존재한다. 그러므로 한쪽이 무너지면 다른 한쪽도 무너지게 되어있다. 眞我는 자체로..